[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웹진 마음 열 번째 인터뷰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설립자이자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이신 능행스님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능행스님을 만났습니다.
여름의 더위가 짙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웹진 10호를 특집호로 준비하며 우리 마음 편집진들은 능행스님을 초대했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이런 거룩한 초대가 뭔가 부담스럽고 나를 긴장되게 하네∙∙∙” 하시며 웃으시는 스님께 마음이 묻습니다.
스님, 1988년 3월 봉사활동으로 시작해서 2000년 독립형 호스피스시설 ‘정토마을’을 개원하고 운영하시다가 2004년 공식적으로 재단이 설립되어 현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의 설립 계기는 스님의 에세이와 매스컴을 통하여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반해 2008년 설립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스님께서 대학원을 설립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환자들을 계속 돌보는 일을 하다 보니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에 걸릴까. 왜 이 불치의 병은 우리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게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그런 고민을 안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 마음이 병드니까 몸에 병이 드는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 몸이 병이 들어서 마음이 병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마음이 병들어서 몸에 병이 드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어요.
그걸 알고 고민했어. ‘마음과 몸이 함께 아픈 이 사람들을 어떻게 케어 해 주어야 할까? 몸도 마음도 덜 고통스럽게 머물다 가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그때 생각한 것이 병원을 먼저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음만 간절했지. 그런 전문 인력 없이는 병원을 지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마음에는 계속 ‘아, 교육사업을 먼저 시작해야해.’ 그런 생각을 했지.
그래서 처음 법인을 설립할 당시에도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하겠다고 명시해 놓았던 거야. 언양에 병원 지을 땅을 사고 내려왔을 때도 의료사업보다 교육사업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대학원 대학교를 지어야 된다는 마음이 간절했지.
근데 땅을 산 2005년도 그 해에, <섭섭하게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책이 팔리기 시작했어요. 2007년까지 책이 엄청난 수로 팔려나갔고, 그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걸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그래 이 돈으로 교육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원 대학교를 짓기 이전에 교육원을 통해 충분히 임상경험을 해 보고 경험이 축적 되었을 때에 학교를 짓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고 추진을 시작했지.
그때 반대가 엄청 많았어요. 그 돈들이 병원 짓는 곳에 다 사용되었어야 하는데 갑자기 교육원을 짓는다 하니까∙∙∙.
엄청나게 반대도 많았고 장애도 많았지만, 책 판매 된 돈으로 밀어 붙였고, 그렇게 2007년도에 교육원을 개원하고, 2008년에는 대학원 대학교를 당장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체계를 한번 잡아보자 하고 지금의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문을 열었지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특성은 임상상담전문가과정의 실천적 성격일 텐데요. 임상상담전문가과정이 우리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 불교라고 하는 거대한 정체성 안에서 보면 참선도 있고, 행선도 있고, 좌선도 있고, 명상도 있고, 염불선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임상상담전문가과정은 활선이야. 활선, 활동을 통해서 수행을 하는 거지.
사회의 역할로 본다면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교육원을 통해서 배출된 여러 학생들이 질병과 죽음이라고 하는 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하나의 빛, 등불이 되는 거예요. 어둡고 아픈 곳에서 치유의 등불이 될 것이고, 어두운 곳에서는 빛이 되어야 해요.
이러한 역할을 통해서 사회를 맑고 건강하게 가꾸어 가요. 아픈 곳에는 치유의 빛으로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에는 밝은 햇빛으로, 돌봄의 빛으로, 회복의 빛으로, 용서의 빛으로, 사랑의 빛으로∙∙∙. 이렇게 다양한 빛으로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스님께서 앞으로 그리시는 대학원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까지처럼 위덕대학교와 협력해서 전문성을 높여가고, 때가 되면 학교로서의 구색을 갖추어 우리가 원하는 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해야지.
지금 우리나라에 대학원 대학이 굉장히 많다는데, 일반적인 대학원 대학교를 만드는 거라면 우리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이 세상의 고통에 접근해서 그 고통을 실질적으로 들어주고, 그 아픔에 실질적으로 다가가서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훈련하는 학교로서 특별한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 특별한 학교를 만들고 싶은 것이 스님 욕심인데, 우리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막판에 가면 속도가 빨라질 거라고 믿어요.
스님, 모금을 위해 지구를 열 바퀴 돌고, 28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 고비의 순간도 많으셨을 텐데요. 스님께서 정말 힘드셨던 순간은 언제였는지요?
힘든 순간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순간이냐고 물으면 선별을 하기가 어려워(웃음) 종류를 얘기를 해야 해.(웃음)
인간적인 힘듦∙∙∙? 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구 열 바퀴를 돌며 모금만 할 때에도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한 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는 병원을 짓기 시작할 때 두려움이 무척 컸어요. 경험이 없는 가운데서도 병원을 지어내야 한다는 압박감, 부담감, 이게 참 많이 스님에게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어려움들을 의논하거나 함께 고민할 멘토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 오직 혼자 고민하고 결정해 나가야 했던 그 5년의 과정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
뭐라고 해야 하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차들은 라이트를 켜지 않고 달리고 그 가운데에 스님이 서 있는 듯 했어요. 인간들의 관계라든가 일이라든가 돈이라든가 모든 것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겠지. 관계, 그 속에서의 갈등, 또 일을 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갈등들과 시행착오들. 길이 있기는 한데 보이지 않는, 걸어가기는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을 수 없던 그 5년 동안이 가장 힘이 들었던 것 같아.
그때, 두려우셨어요?
두렵기도 하고, 책임감 때문에 압박감도 엄청 심하고∙∙∙. 완성을 해야 하는데 이걸 완성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고. 제일 큰 것은 이런 일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준이 서지 않는 거였어요. 길을 만들어서 찾아가야 하는데 출입구가 안 보이는 거지. 길은 분명 있는데, 어느 길로 가야 출입구가 나올지 모르는 거야. 출입구를 빨리 만나기 위해서 아주 신중하게 발을 내디뎌야 했지. 많이 힘들었어.
돈을 많이 가지고 병원을 지은 것도 아니었고... 18억 가지고 병원을 짓기 시작했는데 다 짓고 나니 들어간 돈이 120억이었으니까. 그 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어.(웃음)
건축 현장이란 곳은 다른 현장하고 또 많이 달라. 특별함이 있어. 아주 대단한 전쟁터와 같았어. 내가 전쟁이라도 경험을 해 봤으면 잘 헤쳐 나갔을 텐데 한 번도 경험이 없어가지고.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것이 나에게는 계속 이슈였고, 두려움이었어.
우리가 터널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 차들은 라이트도 켜지 않고 무작위로 질주를 하고 나는 그 사이를 피해서 차에 치여 죽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가야 하는데 길은 안 보이고 이럴 때. 그런 상황에 너무 오래 노출이 되어 있었네. 병원을 짓는 5년 동안.
그런 중에도 바깥에 다른 일들은 다 헤쳐 나가야 했다는 거야. 관계, 돈, 일,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지. 그 5년이 최고였어. 고통의 절정의 최고. 그런 시간이 5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 참 길긴 하지.
극복이 되셨어요? 그 두려움이?
(웃음) 극복이 되었다가 다시 재발이 돼서 작년에 홍역을 앓았지.
올해 2월부터는 다시 떨쳐내고 그런 고통으로부터의 에너지에서는 조금 벗어난 것 같고, 지금은 조금 색다른 에너지로 있는 것 같아. 다음에 다시 병원을 짓는다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에너지로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해.
극복이 스님 스스로 된 것인지, 아니면 극복의 방법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방법이 있었어.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방법이 무어냐 하면 내가 나를 돌아보는 거였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내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어떤 불안을 가지고 이 일을 했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나와 함께 부대끼고 힘들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조명해 보기도 하고, 내 입장에서 조명해 보기도 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했지. 수용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어.
또 더 높은 차원에서는 이것이 이생이나 저생이나 어느 생에선가는 반드시 내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받는 과보라고 생각했지. 과보. ‘마땅히 경험해야 할 것을 경험했구나.’ 하고 나의 경험들을 수용했어요. 그렇게 수용하고 나니까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오는 거예요. 누가 잘 하고 못하고 그런 건 다 없어지고 ‘아, 내가 경험할 것을 경험했구나. 문을 잘 찾아 나왔으니까 잘 했다.’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생겨난 일들이니 내가 다 품어 안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수용하고 품어 안고 극복했지.
스님,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최고의 선물? 최고의 선물∙∙∙. 뭐였을까?
최고의 선물은 나와 함께 호흡하고 발을 맞춘 동료들이 최고의 선물 같아. 그 이상의 선물은 없어.
그리고 앞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아∙∙∙ 남기고 싶은 선물? 모두가 협력하고 협동해서 이 지구의 모든 가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고, 그런 중심을 만들어 주고 싶고, 그것이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동력을 만들어 두고 가고 싶어.
스님, 우리 웹진 ‘마음’의 공통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에는 생각들이 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대학원의 졸업한 동문들, 재학생, 예비 신입생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이곳에서 빛이 되어라. 이 세상에 빛이 되어라.(^^)
마음에 깊은 울림이 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던 능행스님과의 인터뷰 시간이 저희 편집진에게는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마음으로의 초대에 응해주신 능행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재능기부 : 교정(이선영-부산 개금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