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김두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2020년 6월 21일은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는 하지이자 오후 3~4시경 부분 일식이 예정된 멋진 날입니다. 일요일이기도 한 이날 만나기로 한 분은 생명교육전문가 과정을 밟고 계신 대학원생 김두환 선생님입니다.

 

원래 대학원의 수업은 토요일에 진행되고 김두환 선생님은 먼 지역에서 통학 중이셔서 그 동안엔 좀처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날 특별히 붓다빨라 스님의 사띠명상 특강이 열리고 김두환 선생님도 참석을 하셔서 점심 때 시간을 내어 잠깐 만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두환 선생님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계시다가 정년퇴임한 이력이 있으십니다. 남다른 탐구심과 학구열로 첫 학기 기말세미나 때부터 칠판 가득히 판서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발표를 하여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셨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영남알프스 산들로 둘러싸인 카페에서 음악처럼 그윽한 차향기를 마주한 채로 김두환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벌써 생명교육전문가 과정 3학기네요. 이번 학기 어떠셨는지요? 지금 서울에 계시니 이번 학기를 시작하는 마음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수업을 진행하다가 대면수업을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었죠. 

사실, 출석을 많이 못했죠. 수업에 참여한 날이... 제가 또 그 사이에 수술까지 했으니까, 한 2주 정도 되나 싶네요. 그 수업 자체도 빠졌었거든요.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집중이 안 되었던 학기이기도 해요.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학기가 아니었는가 해요. 그것을 우리 불교와 관련된 생각을 코로나19와 연결해서 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공존(NGO 생명교육 네트워크_공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우리 연구과제와 연결해 보면, 우리 인류가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인 것이 아니라 원래가 원래가 그런 것이 아닌가. 이번 학기는 이러한 것을 일깨워주는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NGO 생명교육 네트워크_공존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2017년 10월 14일 설립한 비영리단체로서 인류와 일체 생명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생명 교육을 통해 공존의 가치를 공유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존의 주요사업으로는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무료시민특강, 어린이명상수업이 있으며 멤버들도 각 분야에서 연극 활동, 명상지도자 활동, 호스피스 활동, 교육지도자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선생님은 공존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계시죠. 거기에서 연구하고 있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요.

현재 자료수집 단계에 있어요. 지금까지 진도 나간 것을 보면, 일단 지금까지는 연구자들이 종교 위주로 공부를 했거든요. 기독교, 유교, 천주교를 세 사람이 나누어서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고, 인간교육 또는 생명교육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어요. 종교 자체가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당연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 다음이 우리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할 단계였는데,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연구자들이 서로 만나지를 못했죠. 거기에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또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요. 세 사람 다 불교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려고 했거든요.  생명교육과 관련된 교리를 한번 찾아보자라고 했는데, 결국에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염병 사태가,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거죠. 계기가 되고 동기를 주었어요. 

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연기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혼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전에 기말세미나 때도 발표를 했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했었는데, 연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 하나의 행동이 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나의 존재와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불교의 연기론이 말해주는 것이고, 최근의 이 (코로나19) 사태는 진짜 그것이 전부임을 증명해준 거예요. 


 

 


● 지난 학기 기말세미나 때 선생님께서 12연기(緣起)를 주제로 정말 열띤 발표를 하여 박수를 받았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판서를 하시면서 정말 열정적으로 하셨죠.

원래는 연구내용을 정리하여 책을 발간할 계획이었는데, 올해엔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런 날이 올 거예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공존의 구체적인 사업이 이루어지도록 그 바탕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연구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혹시 아시는지요. 종교계가 생명윤리에 대하여 선언을 한 것이 있더라구요. (네). 우리와 아주 유사한 내용인데, 자살예방을 위한 것으로 기억해요. 모든 종교가 거기에 다 참여했고, 그 선언문을 각 사찰에 보냈다는 뉴스였어요. (2019. 6. 18. '생명 살리기, 자살 예방을 위한 종교인 선언') 말하자면, 이미 우리나라 종교계가 자살을 먼저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한 거죠. 이미 만들어진 이론도 한번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 선생님,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셨나요.

2019년 1월이었어요. 정시모집이 끝났을 때죠. 그때 제가 갑자기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이미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은 알고 있었거든요. 초파일에 정토마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모셔오는 행사를 할 때 (2016년) 석남사에 갔다가 집사람하고 들른 적이 있거든요. 진신사리 친견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받은 많은 홍보물 중에 대학원 것이 있더라구요. 원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랬는지 '아, 여기는 대학원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2019년 1월달의 상황이 굉장히...

2012년 봄에 학교에서 퇴직을 하고 7년쯤 되는 기간 동안에 뭔가 하려고, 나름대로 마지막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도 안 되는 것 같았어요, 그게. 뚜렷하게 눈에 보이게 뭐가 안 된다, 사업이 안 된다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의 정리가 안 된 것 같았죠. 거기에다가 집사람이 서울의 아이들 집에 올라가 버리고 혼자 있는 상태였었고, 아이들 집에도 걱정거리가 있는 상태 등등이 내 인생을 정리하는 데 상당히 방해? 어려움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라에, 사람마다 다 해결방법이 다른데,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냥 공부가 아니고 바로 내가 70 넘어서, 그때 나이가 일흔하나였거든요. 우리나라 나이로. 정리를 해보자. 평소에 내가 좋아했고 또 공부하려고 했던 불교 공부를 해보자. 그럼 혼자서 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닐 거다. 분명히 사람 사이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보자 하는데, 딱 생각난 것이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보자, 가보기 전에 전화를 했지요. 

전화를 할 때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한 뒤입니다. 아마 오지 말라고 해도 갔을 거예요. (웃음) 그래서 들어간 거예요.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내 나이 또래는. 

그러나, 저는 70이 넘으면 굉장히 평화스러워질 줄 알았어요. 공자 말씀에도 70이 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거침이 없다고 논어에서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더라구요, 이게. 솔직히 이야기하면, 소위 말하면 분노라든가 또는 욕심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욕심은 뭐, 그리 욕심은 없었지만은, 작은 욕심도요. 그런데 분노라는 것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늙어가는 내 자신이 변하지 않는 모습에 제가 실망을 한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 못났나. 누구나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느꼈어요. 좀 모자란다. 하~ 좀 멋지게 늙을 수 없나.  

제가 원래 약간은 그런 기질이 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도 아이들에게 생활지도를 할 때 내가 가진 인격을 가지고 지도를 못했을 때 굉장히 어려움을 느꼈어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이런 아이들도 있고 저런 아이들도 있고, 말 잘 들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걸 자꾸 내 인격과 연결시켜서 힘들어하는 거예요. 

아마 70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도 역시 그랬을 것 같아요. 70이 되면 사람다워야지 왜 그 모양이냐, 이런 게 아마 마지막이라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동기를 갖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해요. 

 


●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 어떠셨나요? 대학원 공부가 도움이 되고 계신가요?

대학원에 올 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 열심히 해야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이게 마지막이거든요, 마지막. 무조건 열심히 해야지. 특히 이것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이기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그리 안 보였어요? 하하.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대학원에 가면 나보다 젊은 친구들과 공부를 공부답게 하는 분위기를 한번 만들어 볼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석사 학위는 딴 바이고, 분위기는 제가 알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간다면 정말 학우들과 학문이랄까 불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토론하고 공부하는, 그런 대학원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제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했죠, 하하하. 대학원생들이 활발하게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습니까. 

 


● 벌써 한 학기만 남았는데요, 아쉬움은 없으신지요? 작년에는 대학원 공부 이외에도 같은 재단인 마하보디교육원에서 불교논리학 공부도 하셨는데요.

불교논리학 이야기 좀 할까요? 사실, 내용은 우리나라 책 가지고 그냥 공부하면 다 있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티벳인들이, 티벳불교에서 어떻게 공부를 시키느냐, 불자들뿐만 아니라 스님들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제가 교사잖아요. 딱 앉아가지고 강의를 듣고 하는 것보다 훨씬 멋진 모습입니다. 

(티벳 논리학 특유의 토론방식인 딱셀에서처럼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는 시연을 하면서) 이런 모습들, 그리고 몸으로 행동을 하잖아요, 그렇죠? 그걸 잘 응용하면, 한국의 교실에서도 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티벳 논리학에서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는) 그런 행동들이, 토론의 결과로서 그렇게 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티벳에 가면 군데군데 토론팀이 모여서 다 이렇게 손을 치고, 그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매력적인 동작입니까. 그래서 공통적인 어떤 결론이 났을 때 진짜로 지식이 되는 거죠.

또한 티벳 논리학의 1구, 2구 같은 형식들도 소위 집합 개념을 가지고 하는데, 개념이 명확해진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 (한국) 스님들도 적응을 잘 못하잖아요. 그건 개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의미거든요. 티벳 논리학의 그 방법이 정말 좋았어요. 

우리가 티벳어를 한국 말로 알 수만 있다면, 티벳 스님들이 티벳어를 쓰지 않고 바로 강의를 하실 수 있다면 굉장한 성과가 있을 거예요. 지금은 통역 과정이 정말 기니까 뭔가 안 맞지만, 티벳 스님들이 우리말을 완전히 배웠을 때 그 수업 방식은 최고가 될 거예요!

 


●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늘 모자랐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내가 원하는 바가, 내게 주어진 것들이. 어찌 보면 욕심일 수도 있는데, 늘 좀 모자랐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 아 정말 멋진 선물이다라는, 말하자면 엄청나게 오랫동안 기억나고 잊을 수 없는 그런 감동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늘 모자람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사람들이 흔히 결혼을 했다, 아이를 가진다 등등을 말하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대단해 하지 않고, 보편적 생각을 가지고, 별 흔들림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인정 없는 사람. 물론, 작은 기쁨들이 늘 있어 왔죠. 그런 하나를 딱 꼬집어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그런 것을 다 뛰어넘어서 정말로 멋있다, 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어제 저녁에 생각을 해보았는데, 어떻게 마음을 한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은 직접적인 직유로서는 안 되지만 은유로서는 되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저는 마음을 '내 손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손자가 두 놈 있는데 그 중에 한 놈, 그 놈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아이 마음을 알 수 없거든요. 알고 싶은데, 정말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마음을 모르듯이, 일반적인 마음이라는 것도 그럴 것이다. 

특히 불교 공부를 하면서, 유식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이것 때문에도 끊임없는 고민과 어떤 지적 호기심이 지금 계속 생기고 있거든요. 정말 마음을 모르겠는데, 지금 현재는 '우리 그놈이다'. 모르는 거니까. 그놈 마음도 알고, 진짜 보편적인 마음도 아는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하하하.


●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이왕 오신다면, 대학원에서는 선생님들이 다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걸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거든요. 학생들이. 선생님들이, 교수님들이 끌어주시는 방향대로 공부를 하시되 이왕 오신다면, 우리가 취업을 위해서 오시는 분들은 없잖아요. 마음을 알기 위해서 오는 분도 있고,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오시는 분도 있고. 진짜로 한 2년 동안 몰두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는 대학원의 학위는 기본적으로 학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도 공부하시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졸업하고 어디를 가든 논문 한편은 척척 써낼 수 있는, 연구보고서를 써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가면 어디 가서든 그 능력이 아마 쓰일 수 있고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또 공부를 하시게 되면, 박사를 하시더라도 기본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 논문은 다른 것과는 좀 다르잖아요. 그렇죠? 그 능력을 딱 자기 것으로 갖추고 간다면 공부하기가 얼마나 쉬워요? 대학원은 그것을 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냥 공부는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그래, 끝을 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고 싶네요. 

 

 

● 바쁘신 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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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최경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포근한 날씨가 많은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2학기 기말세미나를 앞둔 어느 겨울날,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나 포근해서 바람마저도 봄날처럼 따사롭게 느껴지던 그날, 대학원생 최경희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학기 중엔 매주 토요일마다 수업을 듣느라 바쁘고 평일엔 평일대로 개인상담 일로 바쁘게 지내시는 최경희  선생님이기에 만남이 몇 번씩 연기되곤 했었거든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대학원에서 멀지 않은 울주군 상북면의 아름다운 한옥 카페입니다. 영남알프스가 이어지는 아늑한 산길 언덕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한옥 카페는 평일인데도 차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 많았고 바깥날씨도 따듯해서 우리는 한적한 정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커다란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오후의 햇살이 내리비치는 그곳에서 우리는 따듯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최경희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윽한 커피향처럼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요즘 네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하는 일 부분은 개인상담이구요. 그밖에 다른 일은 별로 없어요. 잘 쉬고 있어요.


-네 가지 일을 하신다고 하셨는데요. 대학원 공부까지 포함하면 다섯 가지 일을 하고 계시네요? 가장 애착을 갖고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개인상담요. (잠시 침묵)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상담을 시작한 건 2015년부터예요.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상담을 시작했구요. 그렇게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어요. 그런데 내담자들을 생각하니까... 얼마 전에 자살 시도를 했던 내담자도 있었구요. 힘들었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니까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눈물이 나네요. 상담을 할 때 같이 울기도 해요. (계속 눈물) 맨날 울지는 않는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데 있었던 일을 물어보시니까 갑자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그렇죠. 상담을 시작하고서, 음... 상담을 먼저 시작했다기보다 마음공부를 먼저 시작했죠. 그러다가 상담 분야를 알게 되었구요. 학부 1학년 때부터 태롯(tarot)이 손에 잡혔죠. 그러다가 불교 쪽이 자기를 바라보는 데는 가장 맞는 것 같았고 저하고도 맞는 것 같아서 전문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온 거예요.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제가 몰랐던 것들에 대해 좀더 고민을 할 수 있었고 사람의 균형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의 심연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죠. 저에게는 이 대학원에 오게 된 게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대학원에 들어와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배우게 되신 건가요?

 

저는 초파일에 한번 절에 가는 정도? 그 정도였고 교회는 편하지 않은 사람. 누가 종교를 물어보면 불교예요라고도 하고, 무교라고도 하고, 그냥 그 정도였어요. 저는 불교를 학문이라기보다는 불교 = 삶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불교를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나를 알고 싶어서 불교 쪽 관련된 책도 읽고 공부도 하게 된 거죠. 아직도 깊이 있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요. 나를 알고자 불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인간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우주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역할을 불교가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편안해졌어요. 도움이 많이 되었죠. 개인상담에도 도움이 되구요. 상담에도 불교를 접목해서 개인상담 때 명상을 시도하기도 해요. 내담자와 같이 명상을 하기도 하고 숙제로 과제를 내주기도 하죠. 그러면 명상에 관심도 없던 내담자가 명상 동아리에 가입을 하여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걸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요.


-이제 논문학기만 남으셨는데요, 졸업 후 계획이나 꿈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고민이긴 한데요. 처음에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개인상담센터를 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지금 현재 상담 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많고, 상담 일을 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그리고 상담센터를 차리시는 분들도 많은데 문을 닫는 분들도 많으세요. 주변에서 그런 일들을 보면서 때때로 고민을 좀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지금 하고 싶고, 내 양심에 맞는 일을 하면 세상이 나에게 시키는 일이 올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죠.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을 하나 하나 해나가는 것, 거기에 집중하고 있어요.

제가 중학생 학생회에서 활동을 좀 하다가 결혼해서 민간복지기관에서 일을 좀 하다가 민간복지기관의 장이 노동운동을 하시는 분이어서 그분하고 일을 같이 했었어요. 앞에 나가 노동운동을 같이 했다기보다는 연결된 일들, 행사나 집회 있으면 한번씩 가고 그런 정도였죠. 제 생각도 그런 쪽을 띠고 있죠.

그분은 선두에서 리드하는 그 모습과 함께 인품이 넉넉하셔서 뒤에서 또 끌어안는 부분도 넉넉하셨어요. 저는 정치인에 대해서 안 좋은 말만 들었었는데, 제가 그분 밑에서 직접적으로 일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어요. 물론 사람이니까 실망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분은 아우르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주변에 그분을 존경하는 분들도 많았고 저 또한 그랬었죠.

제가 선택은 해왔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구나, 공동체가 있고, '함께'가 있고, 그걸 중심으로 내가 선택하고 움직였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도 사람이 먼저인 분이었고 공동체가 먼저인 분이었어요. 대학원에서 만난 김경일 교수님 또한 마찬가지구요. 김경일 교수님 수업 때 저는 맨 앞에 앉거든요? 김경일 교수님 강의 때면 너무 좋아서요. 솔직히 대학원 수업 중에 김경일 교수님 수업이 제일 좋아요. 제가 웃음이 떠나질 않죠. 교수님도 아실 거예요. 하하하.

첫 1학기 끝나고 강의평가 때 제가 뭐라고 평가했느냐 하면요, 김경일 교수님 강의는 정말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이런 강의는 처음 들어본다고 적었어요. 그런데 정말 김경일 교수님은 한결 같으세요. 위트도 있으시구요. 김경일 교수님 너무 좋아하죠.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첫 마음이 기억나시나요?

 

입학했을 때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어요. 내가 상담을 하면서 불교 쪽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상담에 접목하리라. 내가 실력이 된다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거죠. 내가 하는 일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다면 널리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좋겠다, 그런 프로그램을 한번 만들어보겠다라는 큰 포부를 안고 왔었죠, 하하하.

제가 개인상담을 하면서 내담자들과 명상을 하고 과제를 내주고 있어요.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설명을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깊이 알고 제대로 알아야 그 사람에게 맞게끔 설명을 해줄 수가 있어요.

알아듣기 쉽게요.

그래서 상담 때 제가 아는 선에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유식'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거나, 우리 불교 쪽 용어로 '아뢰야식'이라든가 이런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해 주죠. 아직 프로그램을 만든 건 아니지만 불교를 접목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현대 상담이론들이 많이 있는데, 저는 서양에서 온 이론들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우리나라의 불교적인 것이 너무 좋아서, 점목하고 싶어서 조금씩 활용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구체화되겠죠.


-대학원 생활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학교생활하면서 수업이 있는 토요일이 제일 좋았죠. 학교 가는 토요일이.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음... 정말 하고 싶은 걸 배우러 가니까요. 수업시간에 최대한 집중하는 편이었구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1학기 때 야외수업을 갔을 때예요. 통도사 암자를 몇 군데 돌았거든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죠.

그 다음은 기말세미나예요. 세미나 때 같이 공부했던 선배님들, 동기들이 공부했던 것을 설명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저도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민해가면서 준비했던 것들. 그게 제 기억에 남네요. (박수가 많이 나왔지요). 이곳엔 정말 공부가 많이 된 분들이 오시더라구요, 저 빼고. (웃음)


-이제 논문학기 한 학기가 남았는데요, 대학원 생활에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올해는 개인적으로 따로 공부한다고 부득이 한달에 한번씩 주말에 수업에 빠졌는데요. 그쪽에 가서는 채워지지만, 이쪽에서는 수업에 빠지고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그것이 좀 아쉬웠었죠. 더 깊이 공부를 하고자 했던 욕심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요.


-10년 후의 모습은 어떠실 것 같은가요?

 

일단 아이들은 20대 후반이고 자기들이 알아서 할 거구요. 저는 아마도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아... 갑자기 또 훅... (눈물) 최고의 선물은 태어난 거죠. 저는 예전에 힘들었을 때는 왜 태어났나,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 때문에 지금 상담 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지금 몇 년에 걸쳐서 나를 만나고 보니까, 나를 알게 되니까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감사해요. (그때 상공에 까마귀가 나타나 "까악까악" 울음) "맞아, 맞아" 하하하.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태어난 것도 감사한데 제가 만난 모든 인연들, 모든 상황들. 정말 나에게 이런 일이 왔을까, 그때는 그것이 너무 힘들고 부정하고 싶었는데 그 일들이 나를 키웠더라구요. 나를 성장시켜 주었고, 이 세상을 알게 해주었고, 나를 알게 해주었고. 아직 다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나에게 온 모든 것들에게 또 감사하죠.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아... 갑자기 또 훅 들어오네요. 마음... 마음은 나의 세상, 내가 생각하는 세상. (손으로 저수지를 가리키면서) 저 물과 같은 것 같아요. 세상을 그대로 비추어 주고, 나무를 그대로 비춰주고, 그림을 그대로 비춰주고. 그런데 그 마음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그대로 비춰지는 사람도 있고, 그대로 비춰지는 것에 자기 것이 들어가면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없죠. 그래서 제가 갖고 싶은 마음을, 세상을 그대로 비추는 물과 같은 마음이죠. 그래서 제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 같아요. 그걸 위해서. 그 마음에 머물고 싶어서.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너무 잘하고 계셔서요. 후배님들 보면 오히려 제가 배우거든요. 우리가 후배였을 때 선배님들이 저희한테 했던 말씀들이 있어요. 정말 칭찬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우리 기수들이 후배를 보면 또 그 마음이 드는 거예요. 어떻게 저런 생각들을 하지? 야, 공부 많이 한다. 잘한다. 선배님들이 저희들 볼 때 해주신 말들이 이 마음이었구나, 그냥 이쁜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대학원에서 맺은 인연들인데 저 또한 선배로서 후배한테 이 길에 있어서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후배들이 뭔가 물어오면 내가 아는 선에서 답을 해주고 싶고 도움을 주고 싶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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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안인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난 여름은 정말 더웠고 잊을 만하면 크고 작은 태풍들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곤 해서 가을학기가 더더욱이 기다려졌던 것 같습니다. 개강하자마자 추석연휴가 겹쳐서인지 아직 여름방학 중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던 평화로운 오후. 우리는 양산 통도사 가까이에 있는 갤러리카페 '스페이스나무' 로 바삐 달려갔습니다. 멀리 부산에서 오시는 대학원생 안인옥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작은 미술관과 공연예술관을 겸한 그곳은 찻길에서 멀지 않은데도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늑했고 곳곳에 놓여진 아름다운 미술품들이 힐링의 손길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하였습니다. 정원에 가득 피어난 붉은 꽃무릇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마주 앉은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너무나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 반갑습니다. 벌써 4학기차인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

 

기분이 너무 평온해서, 그냥 어제 가고 오늘 가는 것처럼 중간에 방학이 없이 쭉 흘러온 듯한 느낌이에요. 방학 때 바쁘긴 했죠. 내 방학이 아닌 느낌? 딸아이가 고3이라서 개학과 동시에 수시 대학입학원서를 써야 하거든요. 딸래미랑 거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어요. 8월 한달은 거의 그 일에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개강을 했으니 우선은 4학기를 잘 보내야죠. (웃음) 논문을 어떻게 쓸 건지는 이번 학기에 고민을 해보려구요. 지금처럼 수업에 참여하다가 어느 날 뭔가 직감적으로 떠오를 때!! 그런 걸,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아직은 안 떠올라서요.

 


[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

 

학교상담 자원봉사 활동을 해보니까 정말 공부가 많이 필요하고 내가 여유롭고 평온하고 굉장히 수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더라구요. 표면적으로 좋게 보는 시선 때문에는 할 수가 없는 게 상담활동이거든요.

 

결혼할 때 나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남편은 자기 역할을 하면서 이렇게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어요. 남편도 나도 엄마 아빠들이 너무 바쁘셔서 우리는 좀 아이들 키울 때 신경을 써주자, 아이들이 학교 갔다 왔을 때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을 원했죠. 정말 부모로서 엄마로서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제 바람이었고 남편이 웠했던 것도 있어요.

 

그래서 그냥 암묵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아이들 대학 보낼 때까지는 돌봐주자는 게 남편이 원한 거고 저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시댁도 제가 그렇게 살기를 원했구요. 그래서 가족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도 아이들 대학 보내고 난 이후로 미루고 있었어요. 내 일을 가지거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었죠. 내가 뭘 할 수 있겠노 싶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것들이 아이 양육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어요. 학교 상담 자원봉사도 학교이기 때문에 하게 되었죠. 아이들 초,중,고등학교까지요. 아이 고등학교 2학년 되니까 나도 자원봉사 졸업. 이런 식으로 딱 7년 정도만 봉사활동을 하고, 이런 식으로 주로 아이와 관련된 일만 공부하고 봉사활동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지금은 큰애가 군인이고 둘째가 고3이니까 그 역할도 빠지게 되었죠.

 

저는 그냥 우리 아이들 키우는 데 도움이 되고 내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봉사활동이었는데, 순수하게 나를 위해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참여했던 활동인데, 남들은 그 봉사활동을 좋게 바라봐 주시더라구요. 지금 다시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정말 잘하고 싶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아이가 하는 말, 표정을 따듯하게 바라봐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지금은 생겼어요. 이제는 하라고 하면 "못하겠어요" 그런 말은 안하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해볼게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 어떠셨나요? ]

 

아이러니한 건, 제가 대학원에 입학할 때쯤 남편의 사업이 완전히 뒤집힌 상황이었어요. 그 동안 활동을 하든 안하든 경제적으로 구애받으며 살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제가 대학원에 다니고 있더라구요. 힘이 된 거죠.

 

내가 남편의 상황을 반대로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남편을 탓하지 않고 내가 남편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역할은 할 수 있다는 것. 솔직히 이런 상황이 되면 가장 하기 쉬운 게 원망하고 탓하고 하는 건데, 내가 그런 말을 안하고 남편을 이해해줄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었던 건 제가 계속 마음을 공부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남편이 가장 힘들 때 내가 남편을 더 힘들게 하지 않는 그런 역할을 내가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어요. 남편이 항상 고마워해요. 사실 갑자기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 만큼 감정적으로 소진이 된다고 할까, 그런 사건들이 많았죠. 상황이 완전히 안 좋지만 남편의 새로운 모습, 새로운 나, 그래서 새롭게 보아주는 우리 아들, 새롭게 보아주는 딸. 그래서 이 일들이 여러 가지로 내게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어요.

 


[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나요? ]

 

러브 마이셀프(love yourself : 너 자신을 사랑하라).

 

너무 많이 슬펐으면 못살았을 것 같아요. 기억나는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우리 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보면 너무 평범해요. 엄마 아빠의 삶이란 것이 나한테만 특별히 더 힘들거나 가혹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 집에나 있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우리 엄마, 언니, 동생 등 내 환경이 특별히 불우했다는 생각이 지금은 안 들어요, 솔직히.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너무너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 내가, 나라는 사람 자체가 굉장히 상황을 좀 심각하게 보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느끼고,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런 성향, 그런 경향, 그런 시선이 너무 당연하게 이어지다 보니 그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평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톤 낮은 느낌, 톤다운된 느낌으로 살아왔어요. 나는 별로 안 즐거운데 사람들은 왜 즐거울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또 깔깔깔 웃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나는 덜 우습고, 나는 뭔가 덜 기쁘고, 그렇게 좋은 줄 모르겠고, 나만 걱정이 이렇게 많고, 나만 이렇게 불안한?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고 별로 안 그래 보인다는 생각.

 

중학교 때부터였어요. 중고등학교 때, 반항하는 사춘기가 아니라 굉장히 내 스스로 고립되고 내 스스로 우울해 하는 그런 것들이 내 성향이었다는 것을 아주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나에 대한 니즈가 없기 때문에 내 스스로 힘든 거지. 무엇 때문에 힘든 건지, 지나고 보니 딱히 왜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내 마음밭이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알았을 때는 알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아, 이제 내 성향이 그랬구나를 알게 되니까 순간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가 나를 잘 케어하면서 살았을 텐데! 싶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나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던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안다고 한들 삶이 바뀌진 않더라구요. 이제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노력을 진짜 많이 해야만 나의 그런 성향에도 불구하고 기쁠 수 있고, 덜 심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또 가려니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을 알고 벗어나려는 노력을 살아온 것만큼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다행히 어쨌든 40대 초반쯤에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 책을  많이 봤어요. 우리 때 부모교육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운이 좋게 상담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와 맞딱뜨려진 거죠.

 

지금은 믿죠, 우연은 없다고.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딱 눈에 띈 상담자원봉사자 모집, 1기인가 2기인가 모집 광고가 내 눈에 띈 건 행운이고 우연일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날 그 모집광고를 보고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전화를 하면서부터 마음공부라는 것을 세상 처음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그 마음공부에 참여하면서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조금 달라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 아쉬움은 없는지요? ]

 

더 열심히 공부할 걸!!! (웃음) 정말이지 마음공부가 내 안식처, 위로, 격려가 되었어요. 지금도 저는 대학원 수업도 받고 스님 법문에도 계속 참여하고 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스님이 이런 말을 강조하세요. "일단 와서 앉아 있어라, 법이 너를 끌고갈 것이니. 90프로 못 알아들어도 나머지 10프로, 20프로가 끌고 가게 된다. 그냥 마음만 내서 계세요" 하고 늘 당부했던 스님이죠. 그래서 졸더라도 법당에 가서 졸고 있어요.

 


[ 앞으로 살아가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

 

지금 현재 해보고 싶은 것은 좀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내가 스스로 만든 틀에서 좀 벗어나서 여기든, 저기든, 거기든 가고 싶어요. 저 비행기 아주 좋아하거든요.그런데 (승무원 생활을) 오래는 못 했죠. 첫번째 떠오르는 것은 경이로운 자연이 있는 곳이에요. 저는 대도시만 다녔거든요. 그랜드캐니언이나 캐나다의 북극 가까운 데 가서 오로라도 보고 싶어요.

 


[ 10년 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

 

일단 제가 살아 있겠죠? 살아 있다는 거니까 진짜 축하해야 할 일이구요. 우리 엄마가 60에 돌아가셨거든요. 저는 60 넘어서의 삶을 엄마를 통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요.

 

[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

 

앎.

 

그게 저에게는 가장 큰 선물 같아요. 몰랐는데 알게 되어서 좀더 편안해지거나 기쁨? 그런 순간들이 저에게는 매우 소중해요.

 

나만 이렇지 않아, 알고 보니 다 똑같다는 말을 그래서 쓰나?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서 만나게 된 불교. 나는 이제까지 마음작용이 마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늘 마음을 쓰고 살면서, 내 마음이 늘 그러면서도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마음이라는 것을 어떤 언어로 정의를 해놓고, 그걸 해석하고, 이런 이치로 이런 원리로 작용하는지 설명하고. 새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텍스트가 있다는 놀라웠고, 위로가 되는 동시에 위안이 되었죠.

 

마음공부는 하면 할수록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되고, 상대적으로 기쁜데도 나한테는 어렵다 그런 생각도 많이 들어요. 마음공부를 하면서 괴로움은 알아도 안 되는 것.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책을 많이 읽고 좋은 강의를 많이 들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길었어요. 그렇게 해도 안 되네? 그런 마음이 더 힘들었죠. 그래서 상담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변에는 그런 봉사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자신이 없어서요. 물어볼까봐 겁나서요. (웃음)

 

어쨌든 마음작용만 알아도,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만 알아도 기뻤던 공부하는 재미.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마음공부하는 자리에는 별로 빠져본 적이 없어요.

 


[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

 

마음이 뭔지는 아직 잘 몰라요. 그래서 지금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마음은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 그 모든 걸 다 포함한 모든 것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

 

같이 공부해서 고마워요. 나랑 같이 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인연으로 와줘서 고맙죠. 같이 수업하고 같이 나누는 즐거움? 그런 것들이 좋아요. 같이 얘기할 수 있고 차도 같이 마시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항상 곁에 같이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어요.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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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 위치한 정토마을에는 아주 특별한 병원이 있습니다. 바로 불교계 최초의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자재요양병원입니다. 그곳이 오늘 만나볼 대학원생 이현 선생님의 근무지랍니다.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계시죠. 늘 보아도 시원시원한 말투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유쾌한 웃음, 멀리서도 금새 알아볼 만큼 힘차고 빠른 발걸음으로 병원을 누비고 다니는 이현님. 그런데 한동안 이현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여유롭게 차 한잔 함께 나눌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답니다. 오늘 마침 이현 선생님이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앞동네 궁근정리에  '별이 나린'이라는 멋진 카페가 있다고 추천해 주셔서 당장 함께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전원 카페 주인장님이 "뷰"가 가장 예쁜 자리를 마련해 주시길래 우리도 가장 비주얼이 좋은 차를 골라서 시킨 뒤 (물론 맛은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죠~) 이야기 보따리를 풀러보았습니다. 

 

 

- 반갑습니다. 먼저 석사 5학기 수료를 축하합니다. 학기를 모두 마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5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요. 사실, 처음 입학했을 땐 막막했어요. 대학원 석사 과정 5학기면 2년 반인데 제 인생에서 이 2년 반이 어떻게 쓰여질까 무섭기도 하고, 이게 잘하는 것인가 불안하기도 했죠. 그런데 누구 말처럼 발을 걸쳐놓으니까 끝나기는 하네요.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일 때문에 부득이 수업에 빠진 적도 있긴 했지만 아주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많이 배우기도 했구요.

 

 

- 간호학이 전공이신데 대학원 전공으로 명상심리학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부분은 기사에서 빼셔도 되는데요(웃음). 꼬드김에 넘어간 거죠, 능인 스님(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영적돌봄 연구실장)께. (웃음) 간호학과 공부는 학교 다니면서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공부라는 게 끝이 없다는 것 맞아요. 그렇지만 일을 해보니 저에게는 간호학 공부보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가 마침 제가 전라도에서 귀농을 해서 살다가 이쪽으로 이사를 왔을 때인데,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명상심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있었죠. 그땐 명상이 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요.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게 명상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명상 수업을 해보니 '너무 흥미로워, 너무 재미있어',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힘주어)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구요!!

 

-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셨나요?

 

우선, 김경일 주임교수님께 들었던 심리학 수업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왜 그러는지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내면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저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럴까를 보는 거죠. 그 전에는 그냥 환자, 보호자, , 직원, 이렇게만 구분이 되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금함 이런 게 생기기 시작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구요. 그 전에는 상대방에게 "이러시면 돼요" "이러시면 안 돼요" 했다면 지금은 ", 그렇군요" "그러셨군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제가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능인 스님께서 지도하시는 CPE(정토마을 자재병원 CPE센터) 수업까지 같이 들었는데요. 그래서 더 시너지 효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처음 여기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았는데 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중환자실에서는 감정이랄 게 없어요. 이 사람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게 죽은 삶이든 살아 있는 삶이든 어차피 이 사람에게 트리트먼트를 해주는 것, 그것이 목적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감정을 가지지 말아야지, 이 사람과의 관계에 선을 그어야지'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무너진 거예요. 호스피스 병원의 특성상 옆에 계속 가게 되고, 얼굴을 보고 표정을 살피게 되고, '아 이건 싫다는 건데, 이건 좋다는 건데'를 알게 되더라구요. 이제 눈빛만 봐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랬던 분들이 임종을 하시는데, 일방적으로 관계가 끊김을 당하는 느낌. 말로는 그러죠. '참 잘 살아오셨어요. 조심해서 가시고,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가시라'고. 하지만 말로만 그렇죠, 다 생각나요. ', 그 동안 내가 중환자실에서 감정 없이 보낸 분들에 대한 벌이구나.' 환자 한분 한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중에는 제가 감정적으로 무너진 모습도 보였죠.

 

한번은 TV에서 중학생들이 노숙자 할아버지가 겨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입고 있던 몇십만 원짜리 패딩점퍼를 벗어서 입혀드리고 업고 집에 모셔다드린 뉴스를 봤거든요. 너무 예쁜 얘기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고 미친 듯이 울었어요. 감정이 무너지는 걸 느낀 거죠. 이게 좋은 건지, 슬픈 건지 그게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슬픈 것, 좋은 것, 감동적인 것 중에 감동적인 거잖아요. 칭찬해줄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감정이 무너진 거예요. TV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면 애들이 저한테 "엄마 또 울어?" 하고 물어요. 힘들더라구요.

 

지금은 무너졌다는 느낌은 받지 않아요. 그 전에는 제 감정을 숨겨야 프로라고 생각했었죠.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려면 감정? 배제해야지. 내가 슬퍼도 고객인데 웃어야지, 잘해드려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뭐 어때? 나도 사람인데, 울고 싶으면 우는 거지.' 그런 마음이 되니까 이젠 대놓고 울어요. 애들 보는데서도 "슬프지 않니?" 하면서 울고. 지금은 그렇게 바뀌었죠.

 

이렇게 되기까지 능인스님께서 굉장히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에게 "감정을 그렇게 꼭꼭 눌러놓고만 있느냐, 아무도 이현 선생을 프로답지 못하다 저 사람 뭐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 오히려 더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렇게 얘기해 주셨죠. CPE 교육을 하시면서 굉장히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항간에는 착해졌다는 말도 들었어요. 예전에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선생님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거든요. CPE 교육 끝나고 "너 참 온순해졌어. 카리스마가 다 없어졌어. 너답지 않아" 그런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손가락으로 눈을 위로 당기며) 눈이 이렇게 됐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쳐져 있대요. 그 사건을 계기로, 그렇게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내 안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변화가 된 거죠.

 

-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해오셨잖아요.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 지금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을까요?

 

제가 얼마 전에 느낀 건데요. 저는 항상 '제가 잘한다'의 기준이 80점었어요. 엄마로서도 80, 간호사로서도 80, 딸로서도 80, 며느리로서도 80, 80점 이상은 되어야 '잘한다' '할 만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저를 힘들게 하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을 해보니까, 엄마 이현도 나고 며느리 이현도 난데 굳이 이걸 하나하나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은 거예요. 며느리 이현이 20점이면 부인 이현은 5점만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토탈 80점만 되면 잘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공부와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 일도 공부도 둘 다 다같이 잘하려고 하면 둘 다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잘하려고 하니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후배들은 즐기면서 대학원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학교에서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수업 듣고 여러 사람 만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게 가장 나은 방법 같아요. 직장은 잠시 잊어두고 쉬러 오는 거죠. 머리를 비우고 또다른 나를 만나러 오는 시간이니까요. 그렇게 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그걸 마지막 학기 때 깨달았어요. 늦게 발견을 한 거죠. 제가 가장 힘들었던 건 첫 학기 때였어요. 1학기, 2학기 때 다 힘들었죠. 세미나 준비도 아주 잘해야 해, 최고로 잘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니까 머리만 아프고 더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3학기 때부터 '못 하면 말지,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다른 사람 의견도 듣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3학기 때 출석률이 더 나아졌죠. 완전히 즐긴 건 마지막 학기였어요(웃음).

 

 

- 세미나 때마다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발표에 대해 교수님들께서 칭찬을 하셔서 인상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배운 것은 아니구요,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잠시 쉴 때 1년간 간호학원에서 강의를 한 적은 있어요. 발표는 대학교 때부터 많이 했었어요. 조별 발표를 하게 되거나 하면 제가 나가서 하곤 했죠. 그런데 사실은 카메라 울렁증도 있고 얼굴 굳어지고 그래요.

 

 

- 이현 선생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혹은 가치)은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가족'이네요. 삶의 이유죠. 어떨 때는 원수 같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뭘 해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죠. 엄마 아빠, 우리 어머님 아버님, 내 남편, 내 아이들. 그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그냥 저 혼자 살았으면 열심히 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사는 거죠. 그 사람들한테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고, 부인이 되고 싶고,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분이 저 서른 살 때 그런 말을 했어요. "세상엔 당연한 게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다. 자식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감사한 일이다. 손 있는 사람은 손으로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때 저는 정말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어. 사실 저는 항상 제가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늘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만하면 됐지' 합니다. 노력하는 나,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 살면서 꼭 하고 싶으신 것이 있나요?

 

저는 다이어트가 굉장히 절실하구요(웃음). 그런데 이건 늘 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 이 순간은 뭘 바라고 있는 게 없어요.

 

.. 지난달까지는 자재요양병원 인증을 통과시키는 게 목표였죠. 그래서 연등 달 때도 '인증통과'라고 썼어요(웃음). 지난달까지는 제 목표가 그거였거든요. 저는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너무 좋아요.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내가 병동에서 본 환자분들이 표정들이 그래서 다 좋으셨구나' 알게 되었죠. 아닌 말로 '나중에 우리 엄마아빠도 모셔와야지' 그런 생각도 하죠.

 

자재요양병원 임종실에선 정말 임종하시는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가족들에게 충분히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줘요, 여덟 시간 동안을요. 처음엔 다들 슬퍼하시다가 시간이 지나면 정리를 하시더라구요. "너는 뭘 알아보고, 너는 누구에게 연락하고" 이러면서 "우리 엄마 잘 가셨어" "우리 아빠 잘 가셨어" "우리도 잘 살아가면 돼" 하시구요. 환자분을 보내드릴 때도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불자도 아니고 종교도 없어요. 왜 합장하는지도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 임종의식을 할 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성스러운 무언가가 있어요.

 

- 인생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요?

 

우리 아이들이죠.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 엄마 아빠도요. 인생 최고의 선물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어릴 때 굉장히 내성적이었고 말도 한마디 못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엄마하고 떨어지는 게 불안해하는 분리불안을 겪어서 학교만 가면 아파서 조퇴를 할 정도로 학교생활이 엉망이었어요. 성적도 아주 안 좋았구요. 그런데 아빠가 부도나고 힘들어지면서 살아야겠었나 봐요. 그 다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제가 변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성격이 많이 변했죠.

 

제가 어렸을 때는 왕따도 당해봤어요. 그래서 지금 사람들을 더 좋아하나 봐요. 또다시 왕따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항상 모든 사람한테 80점 이상이어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싫다 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생각으로 바뀌었죠. 동전의 양면, 단점과 장점이 같이 있는 것 같아요.

 

 

- 10년 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너 참 애썼다, 지금의 저한테도 하는 말이거든요. 너 참 사느라고 애쓰는구나. 애썼어, 정말 애썼다, 너 참 애썼다 애 키우느라고. 애 둘 다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하느라고, 남편이랑 둘이서. 참 애썼네, 잘 살았네, 지금의 저한테도 그 말을 하고 10년 후의 저한테도 그 말을 할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또 일이 벌어지면 해결해 나가야죠. 그럼 또 애쓰겠죠. 그럴 것 같아요.

 

-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요?

 

너와 나. 마음이라는 게 저 혼자 갖고 있다고 해서 전달이 되지는 않거든요. 좋은 마음이든 싫은 마음이든 상대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찻잔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래서 누군가가 있는 너와 나인 거죠. 싫든 좋든 좋은 마음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있어야 하고, 그런 것 같아요.

 

 

- 졸업을 앞두고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저보다 잘하고 계시고 저보다 능력들이 출중하시기 때문에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열심히 살고 계신 분들이라 너무 보기 좋아요. 앞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갈 수 있는 일에 초대해 주신다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얼마든지 참석하겠습니다.

 

- 인터뷰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

[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의열 선배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대학원이 자리한 울주군 상북면 정토마을에는 매일같이 많은 분들이 찾아옵니다. 불교계 최초의 독립형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자재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 가족을 면회하러 오시는 분, 돌아가시거나 아프신 가족을 위해 기도하러 오시는 분, 그리고 병동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하러 오시는 분들까지. 호스피스 봉사자들 중에는 우리 눈에 매우 친숙한 분들도 아주 많습니다. 바로 대학원생들입니다. 대부분 재학중에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하여 졸업 후에도 봉사를 계속 하십니다. 그 중에는 재학생 신분으로 봉사를 하고 계신 이의열 선생님도 계신답니다. 늘 단정한 모습에 품격 있는 매너와 사람 좋은 미소를 자주 보여주는 선생님이죠. 오늘은 때마침 이의열 선님이 호스피스 봉사를 오시는 날입니다. 요즘 들어 정토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아름다운 카페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최근 궁근정리에 유럽 황실 풍의 고풍스런 카페 '부르봉'이 새로 문을 열었다기에 이의열 선생님이 봉사를 마치면 그곳에 함께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카페에 들어가 정토마을에서 왔다고 하자 카페 주인장께서 능행 스님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반가워 하셨고 특별히 예쁜 꽃이 담긴 꽃병으로 데코레이션까지 해주셔서 인터뷰 내내 우아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의열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반갑습니다. 대학원 생활을 포함해서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여기 정토마을에 일주일에 두 번을 오죠. 목요일날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불교호스피스 돌봄 봉사를 하고, 토요일에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수업에 와요. 금요일에는 제가 나가는 선원에 매주 참석해요. 일주일에 3일은 그렇게 정해져 있구요, 나머지는 텃밭 가꾸고 운동도 하고 그래요. 등산이나 골프나. 그렇게 소일하고 있습니다.

 

텃밭은 임대를 한 거예요. 크지도 않아요. 열 평. 오이, 토마토부터 채소를 주로 가꾸죠. 지금은 텃밭에서 상추가 많이 나오구요. 밥에 넣어 먹는 활콩(완두콩)도 심고, 옥수수도 심었고. 특이한 것은 내 밭에만 칸나를 심었어요.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칸나 큰 걸 하나 사다가 여름에 빨간 정렬적인 꽃이 좋아서 그거 하나 심어놨어요. 딴집은 작물 심기 바쁜데 나는 한쪽에다가 칸나 딱 한 그루 큰 걸 한 포기 심었어요.

-선생님은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시고 중소기업 대표도 지내시고 젊은 시절부터 산업현장에 몸담아 오셨는데요, 우리 대학원에 진학하시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우연하게 정토마을 마하보디교육원에서 하는 불교호스피스 "생사의 장" 45기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불교호스피스 돌봄 활동을 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없는 거예요. , 제가 크게 피지컬하게 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고, 영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영적인 무장이 되어 있어야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생명교육전문가 과정을 밟으면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데, 내공을 쌓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입학을 하게 되었죠.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 어떠셨나요?

 

대학원에 입학해 보니 우선 공부가 재미있고 도움도 돼요.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했던 유식학 같은 것도 접해 봤구요. 일반심리하고 불교의 명상심리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지 그런 것도 흥미 있어요. 생명윤리 쪽도 전체적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어요. 그래서 특별한 일 아니면 거의 수업에 빠지지 않고 와요.

 

제가 한 3년 전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67세에 회사일을 그만두었는데 그때까지는 나의 생계와 연관된 것일 수도 있고, 제 전공이 경영학이기 때문에 전공과도 연관된 것일 수 있는 그런 일을 쭉 한 거죠.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나라 산업화의 화두를 타고 운 좋은 세대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자리도 있었고, 또 열심히 일도 했고, 산업화 시대의 일꾼의 한 사람으로 일을 했었죠.

 

정년 후에는 진짜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퇴직하고서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불교와 관련된 것이었어요. , 특히 얘기하자면 생사 문제, 살아 있는 동안에 살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고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쭉 하고 있었고, 생과 사에 대한 관심이 계속 있었죠. 그렇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못했는데, 회사일을 다 놓고 나니까 자유롭게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된 거죠.

제가 불교를 믿는 것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는 거구요. "생사의 장" 교육도 그런 맥락에서 받았어요. 기왕이면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하면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 해서 호스피스 돌봄 활동을 하는 거예요.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했는데 너무 힘들어요, 솔직히. (웃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하는 활동이 환자분한테 도움이 되는 건지, 나한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건지, 이기적인 것인지 이타적인 것인지, 그게 애매모호한... 그래도 진심을 다하자 이렇게 생각하죠.

 

산업 역군으로 일할 때는 목표지향적이었죠. 주어진 목표가 있으면 어떻게든 달성해야 했고, 불가능에 도전한다든지 그런 거였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해외시장 개척해서 우리나라의 건설 장비를 유럽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두세 대씩 팔던 걸 1천 대까지 파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죠. 물론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요. 조직의 일원으로서 유럽에 가서 열심히 하여 그 정도까지 유럽에 뿌리를 내리게 한 거죠.

 

그런데 지금 입장에서는 그런 목표지향적이라든지, 성과지향적인 이런 거 질색이에요. 이제는 그런 거 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요새는 내가 되고자 하고 바라는 게 없어요. 다 놓아버렸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너무 편한 거예요. 내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내가 하고 싶은, 평안하고 좋은 시기를 지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요. 나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내 생애에 감사해야 할 일이죠.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부처님께도 감사해야 하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인연들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요.

 

-오늘도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 봉사를 다녀오셨는데요, 호스피스 봉사를 하려는 분들, 할까 말까 망설이는 분들께 봉사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말씀해 주신다면요?

 

호스피스에 한번 도전해 보면, 심적으로는 어렵지만 그것을 극복해 나가면서 보람을 느낄 거예요. 자기가 정말 진심을 보여주면 환자들은 본능적으로 알거든요. 이 사람이 어떤 마음 상태로 나에게 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면 고마워하고, 갈 때 오히려 그 사람이 내 손을 꽉 잡아줄 정도로.

어려운 부분은, 환자분이 계속 바뀐다는 거예요. 안면이 익을 만하면 가보면 돌아가시고 안 계세요. 그러면 또 새로운 분을 만나서 또 안면을 익혀야 해요.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끼리는 경계심이 있잖아요. 환자분 입장에서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 와서 봉사를 하는 거고, 나도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몇 번 만나다 보면 서로 좀 통할 정도가 되는데, 그러면 또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구요. 새로운 상황에서 가야 하는 게 저에겐 굉장한 부담감이죠. 저 사람이 과연 나를 받아줄까 하는 생각에 괜히 힘들고, 불편하신 분한테 가서 폐 끼치는 건 아닌가? 편하게 누워 계신 게 나은데? 그런 생각도 들어서, 그런 걸 극복하는 게 어려웠어요.

 

이별도 어렵죠. 그런데 이별은, 그분과 계속 같이 있으면 느낄 텐데, 가면 그냥 텅 빈 침대만 보여요. 그러니까 그분이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운명을 하셨는지를 모르니까 이별 장면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남은 항상 내가 체험하는 거니까, 만나야 하니까요. 상황이 다 다르고, 다른 분이니까 만날 때마다 서먹서먹한 것도 있을 수 있고, 서로 간에 탐구도 하죠. 저쪽에선 저 사람은 어떨까 하시고, 우리는 우리대로 저분한테 어떻게 대해야 도움이 될 건지를 생각하고. 그런데 굉장히 제한적이잖아요, 이 얘기가. 그분한테 아무 얘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분한테 과거 얘기를 물을 수도 없는 거고, 내 과거를 이야기할 수도 없는 거고. 호스피스 돌봄을 하는 사람들과 환자들의 관계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고 힘든 자리인 것 같아요.

 

-지금 대학원에서 하는 공부가 봉사활동에 도움이 되시나요?

 

환자 돌봄은 심리적인 소통이니까 공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이랄까, 자신감이랄까 그런 건 있다고 봐야죠. 환자 돌봄도 심리소통이에요. 간병, 돌봄 그것도 심리의 싸움이 아닌가 싶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거니까요. 자신감은 있지만 이것을 딱 끄집어내어 사용한다 그런 것은 아니구요, 그런 건 오히려 호스피스 경험이 많으신 능행스님 같은 분께 배우는 것이 훨씬 낫죠.

불교호스피스 "생사의 장" 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말인데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려운 환자를 돌보는 것은 나를 공양하는 것과 똑같다'. 그걸 항상 기억해요. 교육받기 전에는 몰랐었거든요. “생사의 장에서 들은 말인데, 어떤 책에도 인용되어 있더라구요. 그런 자세로 하면 될 것 같아요. 환자분을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을 내가 지금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성별과 직업과 아무것도 모르는 초면이지만 내가 부처님을 대하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대하면 되지 않을까. 항상 그렇게 하려고 하죠.

 

제가 봉사를 한 지가 3년 되었는데요, 나도 맛사지 같은 걸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요. 발맛사지 같은 거. 여기에 와서 남자 환자들 보면 손발이 차가워요. 그분들은 온기만 전달되어도 좋아해요. 거기에는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몸 위에서부터 쫙 주물러 드리면 온기만 전해져도 고마워하더라구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역시 기말세미나 발표를 했을 때죠. 저도 사회생활 하면서 여러 가지 발표회에 많이 참여했고 주관도 해봤고 들어보기도 했는데, 여기 학생들이 발표하는 건 상당히 기발하고 잘한다 그런 걸 느껴요. 준비들도 착실히 해오고. 그래서 ', 나는 잘못하면 나이값도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잘하시더라구요. 재미있는 주제를 정해서 프리젠테이션을 전문가들도 아니신데 다들 잘들 하시더라구요. 그게 상당히 기억에 남죠. 오히려 꼭 해야만 하는 강제적인 게 아니고 대부분 다 자발적으로 대학원에 들어오신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즐겁게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기말세미나 주제가 다양한 것도 좋아요. 참신한 것 같아요. 저도 이걸 발표해도 되는 건가 했었는데 (웃음)...

 

-현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생명교육전문가 과정 3학기차이신데 아쉬움은 없으신지요?

 

글쎄요, 아쉬움? 내가 명상 수업할 때 그랬어요. 실제로 실습을 하자, 이론만 하지 말고. 그래서 그게 올해부터 도입되어 사실 20, 30분 명상을 하다가 쉬고 그런 건 좋죠. 아까 얘기하던 건데, 욕심인지 모르지만 여기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는 불교병원인데요, 같은 재단인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에게도 호스피스 특강 같은 걸 했으면 좋겠어요. 환자들한테 가서 돌보는 것은 좀 부담이 되겠지만, 특강은 필요한 거 같아요.

 

그런데 우리 대학원은 다들 잘하시더라구요. 야외수업도 좋았고, 하하하. 야외수업은 만점이죠, 만점. 이번 야외수업 때 나는 놀러 가는 줄 알았는데 다들 페이퍼를 준비해 오셨더라구요. 거기 온 사람들 중 나만 빼고 다... 나는 입으로만 했는데 다른 분들은 다 페이퍼를 해가지고 와서 발표를 하셨어요. 야외에서 수업을 해도 놀러만 다니지 않고 사전에 수업 준비를 해가지고 오시더라구요.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있으신지요?

앞으로는 그냥 지금처럼만 살아야겠다. 욕심 부릴 게 없어요, 이 나이에. 제가 올해 칠십이거든요. 칠십이 되면 자기 한계를 분명히 아는 거지. 그리고 내 육체적인 한계, 지적인 한계, 여러 가지 한계를 아니까. 젊었을 때는 그걸 안 내려놓으려고 해요,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내가 이루고 싶은 건 없어요. 다만, 아까 이야기한 테마, 죽음의 문제, 그것이 아직은 좀 미진한데 그걸 더 공부를 하고 싶죠. 그게 불교인데. 좀더 수행을 해서 진짜 두려운 마음 없이 담담하게 죽을 있는 준비를 하고 싶어요, 실제로 안 닥쳐봤으니까 지금은 모르죠. 큰소리치다가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지금은 모르니 그게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인 거죠. 죽을 때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랄까, 내공이랄까 그런 것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 외에 세속적인 명예, , 지위, 그런 것을 추구할 나이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하나는, 제가 불교의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게 제 생애에서 가장 큰 선물이죠. 대학교 1학년 때 백봉 선생님이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게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지금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삶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는 순간들이 두서너 번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봉 선생님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친견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잊고 지낸 게 또 10여 년 되거든요. 그러다가 2011년에 해외 출장을 가는데, 급작스럽게 가다가 책이 없어서 책을 한권 사려고 인천공항에서 두리번거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게 백봉 선생의 책이었어요. 비행기 안에서 읽을 게 그것밖에 없어서 열심히 읽다 보니까 내가 왜 여지껏 외도를 했지? 그야말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발심을 해서 지금 다시 공부를 하고 있죠. 굉장히 우연히, 필연이었거든요. 그때 어떻게 그 많은 책 중에, 그 순간에, 그 선생님 책이 공항 서점에 잘 나와 있지 않은데, 공항 서점에 나와 있을 책이 아닌데, 하고 많은 책 중에 딱 눈에 띄더라구요.

 

또 한 가지는, 정토마을에서 하는 생사의 장교육에 들어오게 된 거죠. 제가 은퇴 후 할일이 없어서 아침에 석남사나 가보자 하고 혼자서 차 끌고 바람 쐬러 갔는데 나올 때 보니까 플래카드가 하나 걸려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생사의 장 45기 모집"이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생사의 장? 이게 뭐지? 보니까 아무나 올 수 있고, 제목도 호기심이 가더라구요. 불교 호스피스라는 제목이. 호스피스는 옛날에 좀 들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거 한번 들어도 괜찮겠구나 싶어서 전화를 걸어서 내 나이에 지원해도 되는지 물어보고 들어온 거죠, 그것도 거의 우연히. 그때 석남사에 안 갔으면 플래카드를 못 봤을 거고, 땅 보고 걸었으면 못 봤을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 지원해서 교육을 받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불교 호스피스 봉사를 하게 되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들어와 인터뷰도 하게 되었네요. (웃음) 고맙게 생각해요. 이런 활동의 장, 공부할 수 있는 장,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정토마을 능행스님이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오늘 스승의 날이네요. 능행스님은 원력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실행력이 있으신 분이죠, 실행력.

 

이 두 가지만 봐도 그건 순전히 우연이잖아요. 모르면 우연이고 알면 필연이라고 하는데 여튼 과거 인연의 소산이겠죠. 그렇게 살다 보면 까맣게 잊은 사람을 우연히 어디서 만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경험도 살면서 두세 번 한 것 같아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죄짓지 말고 살자는 말도 있죠. 세상은 참 보면 우연 같은 필연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자 아녜요, 마음심자. 중국에 불교가 넘어왔기에 불경에 마음심자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최근에 불경 공부를 하다 보니까 구분하기가 어렵더라구요. 마음심은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하는데 말이죠. 하나는 망심(妄心), 하나는 진심(眞心). 허망한 마음과 진짜 마음, 이렇게 구분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그냥 뭉뚱그려서 마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진심은 뭐고, 망심은 뭐냐. 망심은 허망한, 헛된 것이라는 거 아녜요? 헛된 마음은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으로부터,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나오는 마음이 망심이에요. 진심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 '일체유심조"라고 할 때의 ''이에요. 진짜마음은 바탕 자료, 온 우주, 참나와 똑같은 거예요. 온 우주의 바탕이 진심, 진짜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구분을 명확하게 안하고 써요. 그냥 '마음'이라고 뭉뚱그리기 일쑤죠.

진심과 망심을 구별하는 게 불교 공부의 기초가 되는 건데, 그걸 뚜렷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근에야 그걸, 굉장히 중요한 그걸 깨달았어요. 마음공부다 그러면 그때는 아마 진심을 이야기하는 거 같아요. 진짜 마음자리를 알아내는 게 모든 불교 신자들이 추구하는 거고,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부처자리, 성불한다는 게 결국은 진심을 알아내는 거죠. 우리가 성불하십시오하고 인사하잖아요. 그게 진심자리거든요. 마음이 바로 우주이고 우리를, 모든 모습 있는 걸 알게 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전부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불교가 뭐냐고 묻는다면 마음심자 하나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진심, 진짜 마음이죠.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괴로워, 마음을 내려놔야 할 때는 전부 망심이거든요. 그래서 진심과 망심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불교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걸 알고 구분해서 망심을 내려놓고 진심을 찾아들어가는 게 불교 공부하는 거다라는 걸 알면 좀 편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지금 마음이 무어냐 물어보셨는데, “마음은 우주의 본체이고 허공이고 진심자리다그렇게 대답하겠어요. 그 진심을. 그런데 불경에 봐도 그것을 명쾌히 구분을 안 해놨어요. 그래서 저는 문맥을 봐서 진심을 얘기하네, 망심을 이야기하는가? 해석하는데 한자라는 게 많이 헷갈리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번역해서 쓰다 보니까 늘 마음 마음 그러는데 '내 마음 나도 몰라' 할 때는 완전히 망심이거든요. '모든 건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라든가 '마음이 전부다'라든지 일체유심조, 마음밖에 없다고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보고 마음을 깨우쳤다 할 때는 그건 전 우주의 근본바탕, 나의 참자기, 성철 스님이 자기를 봐라할 때의 참 자기죠. 웹진의 마음은 그런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사랑하는 동료들과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나보다 더 열심히 재미있게들 하시고, 다들 인연이 되어서 오셨겠지만 훌륭한 분들이 많이 오셔서 저는 뭐 특별히 해드릴 말이 없네요. 빠지지 않고 수업에 올 수 있는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빠지는 사람은 없겠지만 일단 다 일이 있어서 빠지는 건데, 여기 올 수 있는 인연이 매주 만들어지면 좋겠죠.

 

-수고 하셨습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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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추상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구의 낮과 밤이 완벽하게 같아지고 우리 민족이 한해의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기준점이 되어온 춘분(春分). 태양의 중심이 적도에 이르러 지구의 바로 위를 직각으로 내리쬐기 때문에 지구의 중력도 고르게 분포된다는 특별한 그날에 우리는 대학원 졸업생 추상문 선생님을 만나러 울산 시내로 출발하였습니다. 지난 3월의 졸업식 때 감격의 석사모를 쓰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화창한 봄날의 도심지는 많은 차량들로 붐볐고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해 약속시간에 조금 늦어지고 말았지만 추상문 선생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자, 이제 추상문 선생님과의 데이트에 동행해 보실까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졸업 논문을 쓰시고 심사에 통과되어 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2016년도 봄에 논문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석사 5학기를 마치자마자 개인적인 사정으로 급히 미국에 가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이 논문을 쓰고 계신 것을 몰랐는데 이번에 논문을 쓰셨다고 하셔서 다들 놀랐어요. 재학 당시 선생님께서 준비하시던 논문 주제가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는데, 졸업생을 포함해서 다들 논문이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했을 것 같아요.

 

제가 정토마을에 근무하면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다녔잖아요. 당시에 제가 병원 식당일을 도와주면서 모든 환자들하고 친해졌는데 지도교수님이 저에게 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도록 논문지도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환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40문항으로 된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죠. 환자분 30명 정도 인터뷰를 했는데 제가 논문을 쓴다고 하니까 환자들이 협조를 참 잘해줬어요.

 

그런데 그 당시 미국에 있는 딸이 많이 아팠어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가서 살아야 하는가 싶어서 정토마을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떠나서 한 1년 정도 미국에 가서 간호도 해주고 아이들과 생활을 하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온 거죠. 한국에 다시 오게 된 이유는,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한국에 또 오고 싶은 거예요. 한국을 못 잊겠더라구요. 내가 살 곳은 한국이야.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이제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간다. 내가 이제 미국에 오기는 힘들 것 같다. 너희들 행복하게 잘 살아라." 하고 마지막 인사도 다 해주고 그러고 왔어요.

 

한국에 들어왔을 때 논문 쓸 생각은 안하고, 그 생각은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뭘 할까 하다가 제가 평소 컴퓨터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욕망이 많았는데 시간이 많으니까 컴퓨터를 배워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글2010부터 시작해서 파워포인트, 엑셀 이런 것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그러다 보니까 대학원을 마칠 때 못 쓴 논문이 생각났어요. 창피스러운 얘기지만 그 당시에 제가 컴퓨터를 못 만졌으니까 다시 논문을 쓸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 참에 내가 논문을 쓰자 해서 울산도서관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논문 쓰기 바로 직전에 대학원 다닐 때 지도교수였던 장익 교수님께 전화를 했어요. "교수님, 제가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그 당시에 장익 교수님이 위덕대학교 총장님이 되신 건 몰랐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총장 되었다는 얘기는 안하시고 "제가 바빠요. 그러니 제가 새로운 지도교수를 소개해 드릴게요." 하면서 권기현 교수님을 소개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권기현 교수님을 만났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고마웠어요. 거기에서 용기를 얻은 거죠. 그래서 울산도서관에 출근을 하면서 제가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근무할 당시에 환우들과 나누었던 설문지 조사한 것을 앉아서 차근차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도 하면서 논문을 쓰게 되었죠.

처음에는 참 힘들었어요. , 이거 참 막막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데 권기현 교수님이 참고할 만한 논문을 추천해 주시는 거예요. 이것을 한번 읽어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논문을 썼는지 보고 참고를 해라 하셨죠. 울산도서관에도 논문집이 있어요. 그래서 사서에게 부탁을 해서 제가 다른 논문집도 보고, 그렇게 논문을 쓰기 시작했죠. 중간쯤 쓰다가 권기현 교수님께 확인도 받구요. "제가 이런 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했더니 쭉 보더니 "됐습니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계속 쓰래요. "쓴 다음에 마무리를 하면,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저한테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작년 여름에 얼마나 더웠어요. 저희집에는 에어컨이 없어요. 방에 선풍기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더워서 안되겠더라구요. 그런데 울산도서관에 가면 냉방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시원해요. 새로 지은 도서관이고. 그래서 거기 다니면서 한 철을 보내면서 논문을 쓴 거죠. 작년 4월 말, 장익 교수님이 총장님이 되신 직후부터 제가 논문을 쓰기 시작해서 10월 말 마무리가 되었죠.

 

 

-논문을 쓰기 위해 굉장히 오랫동안 자료수집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2014, 2015, 2016년을 정토마을에서 근무했으니까 3년이 걸린 거죠. 논문 제목이 <말기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 연구>예요. 환자들이 살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을 인터뷰해서 쓴 거죠. 환자들이 협조를 안해 주셨다면 그런 논문을 쓸 수 없을 거예요. 그 논문을 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토마을에서 근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환자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논문을 쓰고 나서 권기현 교수님이 제 논문 쓴 것을 "오케이" 하는 순간 너무나 기뻤어요. "진짜 내 나이에 해냈네~" 하는 마음에 그날 저녁은 제대로 잠을 못 잘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요. 남들이 제 나이를 말하면 거의 믿지를 않으려고 해요. 제가 1944년에 태어났어요. 만으로 하면 일흔셋인가 넷인가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시죠? (웃음)

 

그러고 나서 미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어요. "아빠가 대학원 다녔던 거 알지? 그런데 아빠가 졸업 논문을 못 썼었어. 그런데 요즘에 논문을 완성했다" 하니까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손주들한테도 아빠 학위 받은 것을 알려주겠대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귀감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거예요. 큰딸이 고등학교 교사거든요. 나도 보람을 느꼈죠. 늦게 졸업을 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주 큰 거예요. 자부심이랄까, 마음에 정말 큰 용기가 됐고 삶의 큰 계기가 되었죠.

 

(2019. 3. 2.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석사 졸업식)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고, 너무너무 좋아요. 후배들한테도, 후배들은 또 어떤 마음의 자세인지 몰라도, 이렇게 한번 성취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행인 것은, 그 당시에 제가 환자들과 나누었던 설문지를 폐기 안하고 가지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권기현 교수님도 설문지를 보시더니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이거 안 버리셨네요. 대단하시네요. 바로 이거예요, 이거." 하고 좋아하시더라구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정토마을에 오기 전에 제주도의 어느 절에 있었는데, 사실은 거기에서 대학원에 다니려고 했었어요. 전공은 사회복지를 하려고 했구요. 그래서 제주대학교 대학원에 원서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능행 스님과 연결이 되었어요. 스님께서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와보니까 그 안에 대학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 대학원을 여기에서 다녀야겠다 생각했죠. 저는 불자라는 자부심이 있고 불교에 참 많은 관심이 있었거든요. 전공과목이 좀 다르더라도 나 이거 한번 해보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능행 스님이 추천해 주셨죠. 사실, 정토마을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다니니까 참 편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은 두 딸! 나한테 진짜! 누구나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귀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죠? 미국에 있는 두 딸이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리고 이틀에 한번씩 저에게 전화가 와요. 거의 매일 전화하다시피 하죠. 전화로 대화하고. 작은딸도 그렇고 큰딸도 그렇고 너무너무 아빠를 좋아해요. 아빠가 엄마 없이 키워줬고 그랬는데, 아빠가 한국에 가서 산다는 걸 자기들은 마음 아파해요. 같이 살고 싶은데, 아빠가 왜 그러지? 우리 같이 살고 싶지 않아? 그런 물음을 던지면서 안타깝게 생각하죠.

 

제 나이 50살에, 그러니까 25년 전에 제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당시 저는 브라질에 살았어요. 두 딸이 있었는데 거기서 공부를 시켰죠. 제가 경제적으로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애들을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둘 다 미국에 유학 보내고 그랬어요. 당시에 미국에 영주권 없이 유학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두 아이를 공부시켰죠. 내가 애들한테 그래요. 항상 올바르게 살라고 하면서. 내가 중요한 것을 아이들에게 물려줬어요. 엄마 없이 자랐지만 내가 애들을 키우면서 한국말을 철저하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작은딸은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인데 한국말 다 하고 한글로 편지까지 써요. 한문은 잘 모르지만 한국말은 잘해요. 우리 작은딸 자랑을 하자면 5개 국어를 해요. 에스파이아어, 포르투칼어, 영어, 한국말은 기본이고, 프랑스어. 어디 가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보람 있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은 두 딸이에요.

 

 

-선생님께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무척 기뻐하시면서 자랑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기억나는데요. 그 동안 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셨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잘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가족을 두고 혼자서 한국에 들어오셨죠.

 

외국에 오래 살지 않으면 제 심정을 몰라요. 제가 브라질에 갈 때가 나이 서른 살 때였어요. 거의 40년이 넘었죠. 외국에서 몇십 년 오래 살다 보니까 한국이 너무 그리운 거예요. 나한테는 대한민국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어요. 내가 여기 와서 살려고 들어왔을 때 내 패스포트가 외국인 패스포트였어요. 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는데 김포공항에 딱 들어서니까 6개월 입국비자를 주는 거예요. , 6개월 있다가 나가라는 거네? 살지 못하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법무부장관한테 탄원서를 썼어요. 엊그제 집정리를 하다 보니까 그때 법무부 장관이 나한테 보낸 편지가 나오더라구요. 그걸 내가 간직하고 있었어요.

 

"장관님,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받았던 주민등록번호를 좀 살려주세요. 저는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하고 편지를 보냈더니 한달 만에 회신이 왔어요. 당신의 이력을 쭉 써서 보내 달래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학교는 어디를 졸업하고... 쭉 썼어요. 제가 브라질에서 기업체 운영한 것도 쓰고. 또 자랑은 아니지만 나한테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민주평화통일회의 브라질 지부 자문위원이었던 것도 썼죠. 그랬더니 6개월 비자 끝나기 한 달 전에 법무부장관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선생님이 사시는 동사무소로 가십시오. 가서 주민등록을 발급받으십시오." 그때 생각하면 진짜 눈물이 나요.

 

주민등록증 딱 받고 얼마나 좋은지, 정말... 그 기분은 정말 말도 못해. 그때 미국에 사는 친구한테 편지를 썼어요. 고등학교 동창인데, 만약 내가 죽을 때 네가 내 옆에 있다면 내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나랑 같이 태워줘라. 나는 화장하기를 원하니까, 같이 가고 싶어. 진짜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내 폰 컬러링 알죠? 그래서 내가 컬러링도 애국가로 넣은 거예요. 여기서 살려면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길래 핸드폰 사러갔는데 '컬러링은 뭘로 할까요?' 그러길래 "애국가로 해주세요" 했어요. 애국가도 1, 2, 3, 4절이 있잖아요. "4절로 해주세요" 했어요. 4절이 나는 좋아.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난 이 컬러링은 절대 풀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저는 지금도 꿈이 있어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짧아요.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사용할까, 항상 그 생각을 해요. 아픈 사람들 있는 데 가서 봉사도 하고 싶구요. 그런 게 제 꿈이에요. 저는 인생을 좀 보람되게 살고 싶다, 어떻게 해야 보람되게 살까,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솔직한 얘기로 명절이 싫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고향에 간다, 친척을 만난다, 누구 만난다 그러고 가는데 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게 참, 마음이 그랬어요. 제가 사는 곳이 원룸인데 그곳에 어려운 사람이 몇몇 있어요. 요양원에 갔으면 참 좋겠는데, 이분이 요양원에 안 가려고 해요. 자식들은 이분을 그렇게 많이 도와주지를 못하고 있어요. 제가 도와주고 있죠. 제가 그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짧은 시간이지만 보람도 느껴요. 제가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런 보람된 일을 하고 싶고 여행도 다니면서 그러고 지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은 것이 많을 거 아니에요. 앞으로 살면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참회하면서 기도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런 얘기를 어느 날 어떤 스님께 얘기를, 내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했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참회도 하면서 이웃도 도와주면서 같이 삽시다. 그래서 지금 생각 중이에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참 막연한 질문이네요. 진짜 어려워요. 마음은 내 안의 진리이다.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나이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내가 선배가 될 거예요. 공부를 하다 보면 좀 막힐 때도 있겠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끝까지 해내야 되겠다는 마음자세, 그런 마음 자세를 갖게 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항상 가슴속에 논문 쓰지 못했다는 생각을 담아두고 있었어요. 이번에 논문을 쓰고 나니까, 언젠가는 꼭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명상심리를 배운 것은, 논문을 떠나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내 생활에, 내 마음자세에도 그렇고. 그런 것을 조화롭게 적용해 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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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지금만나러 갑니다.

 

서정용 선님을 만났습니다

 

겨울이지만 봄날씨처럼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던 1월의 어느 날, 창원에서 한의원을 하시는 대학원생 서정용 선님을 만나러 길을 떠났습니다. 말수는 적지만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고 독특한 화두를 곧잘 던지시는 서정용 선님이기에 우리가 준비한 질문들에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 하면서 도착한 곳은 주남저수지 길에 있는 화덕피자집. 겨울방학 기간이기에 서로 반갑게 안부도 물었고 함께 점심도 먹으면서 실타래 풀 듯이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유리창 밖으로는 저수지 깊은 물 위로 햇빛이 눈부실 만큼 반짝이고 있었고 서정용 선님과 함께한 시간도 물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겨울방학인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그냥 늘 지내는 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제가 늘 들어앉아 있잖아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한의원을 한 지 20년쯤 됐어요. 집단상담을 다니는데, 두 번 했거든요. 이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다른 상황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 그런 것이 좀 필요했어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진도가 안 나가고 정체가 되니까요. 그런 목적으로 입학을 한 거죠. 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냐 하면, 실은 서울 쪽 불교대학원을 생각했었는데 너무 멀었어요. 찾아보니까 마침 이곳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왔죠. 그 전에 00이라고 행복명상 지도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 선생님이 전에 한번 정토마을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프로그램에 직접 참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선생님을 뵈러 한번 갔었어요. 그래서 정토마을에 이런 대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은 어떠셨는지요?


그때는 공부를 더하겠다 그런 목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이었고, 여러 사람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한 것이었죠. 수업들이 진행되면서 모호하게 알았던 부분이 명확해졌다는 것, 그런 것이 저에게는 컸어요. 제가 잠시 휴학을 했었는데, 일단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었어요. 1차 목적은 달성되었고, 그 이후에 다른 종류의 일들이 있어서 휴학을 했었어요. 복학을 한 이유는, 하던 공부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원래 성격이 좀 꾸준하게 하지를 못해요. 마음이 내키면 와라락 했다가, 해소가 되면 딴데 또 기웃거리고. 그래서 아 이번에는 하던 것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싶더라구요

 

지난 기말세미나 때 같은 맥락의 주제를 계속 정리하고 정리하셔서 이번에 방대한 분량의 연구자료를 발표하셨어요. 모두가 재미있어하고 호응을 했던 발표가 되었는데요. 앞으로 본인의 연구 분야를 논문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 있으신가요?


원래 논문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니구요. 대학원에 명상수업이 있다 보니까, 거기에다 숙제를 내주니까 생각을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싶어서 자애명상에 대해 궁리를 해본 거죠. 그걸 정리한 것이 세미나 자료예요.

사실 제가 명상, 자애, 자비, 희생, 봉사, 이런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좀 불신하는 편이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자애명상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자료를 정리하면서 얻은 소득이 무엇이냐 하면 자애, 자비, 희생, 봉사, 이런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어요. 제 세미나 발표 내용을 보면 근본적으로 이타심도 개인의 이기심의 수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삶의 이야기를 바라보면 그 이기심이 충분히 수긍이 되는 거죠. 순수하게 나는 이타적이야라고 주장한다면 역시 저는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그것을 숨기고 말을 안 할 뿐이지 그게 있을 거라는 말이죠. 없어도 상관 없구요. 좀더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졌다고나 할까요.

제가 공부 진도를 나갈 때 굉장히 중요한 방법을 하나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선입견이 있다 보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좀더 제가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직 하고 있진 않지만 올 여름에 자애명상을 집중적으로 해볼 거거든요. 그런 뒤 결과를 보고 꾸준히 할지 생각해 보려구요. 자애명상을 가지고 논문을 쓸 것 같아요. 논문을 보통 자기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분야를 쓰잖아요. 제 세미나 발표자료가 정말 논문이 될 수 있을지 교수님께 여쭈어 보았는데요. 제 생각에는 너무 주관적이지 않나 싶었는데, 이것 자체로 논문이 될 수 있겠다는 답변을 들었죠.

 

 

5학기 논문학기를 앞두고 계신데요.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 있으신가요?


제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테슬라 전기차를 만든 일론 머스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는 우리 삶이 가상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매트릭스도 그런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본 책 중에 유발 하라리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해요. 우리 삶은 하나의 가상현실이라고.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런 생각이 자주 일어나죠.

다들 삶의 의미를 찾잖아요. 삶의 의미 부여를 개인이 하게 되는데 정답은 없다고 봐야죠. 그 의미 부여를 할 때 사용하는 재료는 결국 그 동안 쌓아온 경험, 지식, 기억, 이런 종합적인 것에 의해서 삶의 의미를 자기가 규정하는 거니까요. 그것은 우리가 게임에서 제공되는 아이템이라든가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들에 따라 게임이 진행되듯이, 삶의 의미라는 것도 결국 가상현실 게임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나오면서 했어요.

금강경에서는 '일체 상을 여의면 부처를 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결국 우리가 이야기하는 삶의 의미라는 것도 하나의 상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현실을 인식할 때 육식(六識)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종합해서 나의 현실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감각적인 마음 자체도 하나의 감각기관이잖아요.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여기 지금 세 명이 앉아 있으면 현실이 세 개인 거죠. 70억 명이 있으면 현실이 70억 개인 거구요. 우리는 지금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 내가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진짜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어쩌면 가상현실에 더 가깝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경일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나이가 들면 성숙해지고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보니까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정신세계라는 것이 똑같더라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 말이 참 공감이 가고,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어릴 때는 세월이 지나고 하면 성격도 그렇고 지혜로워지고 그럴 줄 알았는데, 막상 지금을 딱 보면 경험이 좀 늘어서 테크닉은 늘었지만 마음의 움직임들, 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패턴들은 동일하다는 거죠. 다만 좀 더 이해의 폭이 깊어진 것은 있겠죠. 그러고 보면 사람은 평생 나이를 안 먹는 것 같아요.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이 있어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저서인데요. 거기에 보면 생각하는 시스템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거든요. 시스템1은 직관적인 생각과 감정, 음식이 있으면 먹고 싶다라든가 하는 종류의 생각들인데, 우리의 9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해요. 시스템2는 숙고 시스템이라 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멀리 보고 추론하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건데, 이게 나머지가 된다고 해요. 소위 말하는 전문적인 운동선수들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든지 이런 경우에 동일한 숙고 시스템을 통해 공을 차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몸에 익어서 더이상 숙고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시스템1로 작용할 능력이 생긴다는 거죠. 사람에게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시스템2의 차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최고의 선물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찾으면 하나쯤은 있겠죠.

 

20대로 돌아갈래? 하고 묻는다면 어떠실 것 같아요?


20대로 돌려준다고 하면 저주가 아닐까요. 그 나이까지 세월을 견뎌야 하니까요.

 

10년 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나이를 전혀 생각 안하고 살았거든요. 아까 나이를 물어보셨는데, 저는 신경을 안 쓰고 있어요.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은하철도999 아시죠. 거기에서 철이하고 메텔하고 여행을 가잖아요.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우주에 존재하는 우주 승려가 있었어요. 우주 승려가 죽으면서 "도가 참 어렵다. 이 방대한 우주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이 집에 가면 이게 진리이고, 저 집에 가면 저게 진리이고 그렇던데, 이제 와서 이런 진리를 찾다가 지쳐서 간다." 이러면서 "대왕생에 이르렀다"는 나레이션을 적어놓았더라구요.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육식 중의 하나이고 그렇게 알고 있었고 한데, 마하라지가 이렇게 말하거든요. 마음도 하나의 감각기관이다. 제가 거기에서 정말 마음이 감각기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마음은 추상적인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우리가 손으로 만지면 촉감이 생기는 것처럼 촉각을 느끼는 하나의 감각기관이 있듯이, 눈으로 보는 시각기관이 있듯이, 마음이라는 것 역시 흔히 말하는 법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혹은 오식(五識)을 통해 받아들이고 종합하는, 이런 종류의, 구체적인 실체를 가진 그릇처럼 그런 감각기관일 뿐이다. 여기에 범위를 크게 부여할 필요는 없고 캐나갈 필요도 없지만, 신비스럽게 생각할 것도 아니구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각자 일은 각자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용맹정진이니 이런 말 정말 싫어하거든요. 감각기관이 보면 한번에 하나씩밖에 못하잖아요. 두 개가 동시에 안 되는 거죠. (웃음)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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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은 선님을 만났습니다.



항상 기분 좋은 웃음으로 유쾌한 상상을 하게 해주는 임주은 선님을 만나러 가던 날. 우리는 불그스레한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벚나무 숲길을 지나고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서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아름다운 숲속의 찻집 '농도'로 향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맑고 온화한 가을 날씨 덕분에 실내에만 머물지 않고 야외에 나가 원목그네도 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우리. 이제 임주은 선님과 나눈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 합니다. 


반갑습니다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주말에는 대학원 공부하면서 보내고, 평일에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요. 요즘 아주 바쁠 때라서 다른 일은 못하고 있어요.(웃음)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입학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여기 자재요양병원에 입사하기 전부터 해왔고, 진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저는 원래부터 불교와 상담을 접목해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제가 일하는 분야가 사회복지잖아요. 그런데 보통 사회복지현장은 거의 기독교 쪽이고, 상담도 서양의 철학들과 상담기법이 전부예요. 제가 불자이기도 하니까 불교에서 하는 상담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우연찮게 자재요양병원에 입사를 하려고 준비하는 상황에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알게 되었어요. 정보를 검색해 보니까 '아,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가 자재요양병원에 이력서를 내게 된 동기에도 대학원이 큰 역할을 했어요. 


그 동안 사회복지현장에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아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홀트아동복지회 미혼모자 공동생활 가정에서 근무를 했었죠. 그 이전에도 부산에서 미혼모 관리를 하면서 근무를 했었고요. 그 이전에는 YWCA에서 근무를 했었어요. 예전의 근무지들이 기독교적인 곳과 연관이 있는 곳들이었죠.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은 어떠셨나요?


입학하면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다시 떠올려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어요. 부모님이 불자이셔서 저도 어릴 때부터  종교로서의 불교를 자연스럽게 익혀 왔었는데,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학문적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정말 생소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염려도 컸었던 것 같아요. 사실 입학할 때는 가슴 벅참도 있었지만 약간 부담이랄지, 지금도 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부분은 잘 모른다는 생각은 있죠. 대학원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데서 오는 고민들이 아직까지도 있는 상황이긴 해요. 


하지만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제가 종교로서의 불교를 그냥 알 때보다 좀더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 들어요. 그 동안은 믿음으로서의 불교를 많이 봤왔었고 믿음을 제외한 종교적인 갈등이라고 할까, 이것이 정말 확실한 것인가 하는 모호한 질문들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약간 걸러지는 기분이에요. 제 안에 있는 그런 모호함이라든가 종교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안정적인 마음상태가 되는 것도 있고요. 대학원 공부를 할수록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이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대학원 동기들 중 자재요양병원에 함께 근무하면서 동시에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분들이 세 분 계시죠. 학생회장을 역임한 이경화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현 선생님까지 포함해서요. 


사실, 대학원에 지원한 목적 자체가 불교에 중심을 두었다기보다 셋이서 다같이 공통적인 부분은 불교호스피스에 대한 것이죠. 그래서 불교도 불교지만 대학원 전문가 과정에 명상심리 과정도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상담하고 돌봄하는 데 좀더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생명교육 전문가과정이 생기면서 좀더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호스피스나 그와 관련한 돌봄으로서의 접근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서 셋이서 딱히 불교에 대한 논점으로 이야기를 하거나 따로 모임을 갖지는 않았어요. 서로 오고가는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불교적인 것들에 대해서 나누는 대화들은 있죠.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 입사하기 전에는 직장동료 사이에 분명히 명확한 선이 있고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있었는데, 사실 여기에 입사해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사회적 관계라기보다 좀더 가까운, 사적 개념과 공적 개념들이 모호해질 정도로 그런 관계예요. 오히려 저한테는 그런 관계가 좀더 가벼워진 것 같아요. 사회관계에서는 보통 말하는 가면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스스로 벗기는 연습을 하는 거죠.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제가 여기에서 하는 일들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대학원에서 배웠던 명상이나 관련 수업, 교수님 강의들의 도움이 컸어요. 계속해서  내 안에 여운을 남기는 질문을 계속 하게끔 하는 수업이었거든요. 확실히 달랐어요. 그런 것들을 같이 공유하고 대화할 수 있는 데에서 공부를 하니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학원을 공통 분모로 할 수 있는 동기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도 좋았던 것 같아요.   



대학원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지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들은 아주 많은데요. 처음 첫 시간에 둘러앉아서 서로 자기 소개할 때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무척 긴장되면서 설레이기도 하고 감정들이 복합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 시점에서 그 때를 떠올리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그리고 제가 대학원 총무를 할 때 비오는 날 우리가 통도사에 우중산사 체험을 갔잖아요. 그 때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때 제가 차키를 잃어버려서 다시 찾으러 갔던 일도 기억이 나구요. 순간 순간들이 다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4학기인데 아쉬움은 없는지요?


제가 주말에 일이 있어서 한번씩 수업에 빠질 때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공부와 일을 병행해서 하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후회되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아주 감사한 경험들이라서요. 



10년 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은 다 내 노력 덕분이다(웃음). 십년 후면 제가 마흔하나예요. 그 때는 제 영역에서 좀더 능숙해져 있고 단련되어 있는 모습이 되고 싶어요. 업무적으로도 그렇고, 제 스스로의 감정도 그렇지만 일적인 부분에서 뭔가에 휘둘림 없이 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이라고 해도 좋겠죠. 


제가 지금 돌보고 있는 대상자가 환자 보호자예요. 호스피스 대상자죠. 저는 그분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확실하고 면밀하게 파악해서 그것들을 추진함에 있어서 좀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행복감을 스스로 느끼고 보람감을 계속 느끼고 싶죠. 특히나 호스피스 환자분들은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짧아요. 임종하시고 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매 순간 순간 잘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크죠. 제가 그것을 정말 잘하고 있나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부족함이 많다고 느껴요. 제가 호스피스 분야에 들어온 것 자체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경험을 쌓아가는 상황이다 보니 좀더 그런 부분이 있고, 나중에 스킬적인 부분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제가 염두에 둔 논문의 주제가 불교라는 부분과 제가 현장에서 하고 있는 호스피스라는 부분이 결합되어 있어요. 사실 논문이라는 것, 내가 대학원에 들어온 것, 이 모든 것들이 돌봄을 좀더 잘하기 위한 공부이거든요.  논문 주제와 현장이 별개가 아닌 거죠. 그래서 제가 좀더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제가 오늘도 살고 있다는 것. 그냥 그런 것들이 늘 감사하죠. 



저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저에게 마음이란 "바다"예요.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바다를 가까이에서 보면 굉장히 일렁임이 있잖아요. 마음이라는 것도 그렇죠. 그냥 넌지시 사람을 밖에서 보면 그 사람이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무수한 감정들이 오고가는 역동적인 것이 늘상 있는 것 같아요. 그 심연으로 내려갈수록 분명히 또 더 고요하고 깊고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심연을 계속 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인 것 같거든요. 사람의 마음도 그런 바다를 닮은 것 같아요.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저만큼은 수업에 빠지지 마세요~(웃음) 출석에 대한 아쉬움이죠. 바쁠 때는 오기가 쉽지가 않더라구요. 하지만 오는 게 힘들지 오면 아주 즐거운 수업이랍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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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 선님을 만났습니다.



매일같이 구름이 자주 끼고 비도 자주 내리던 어느 가을날,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온실 속 식물원에 자리한 예쁜 카페 '온실리움'에서 대학원생 이경화 선님을 만났습니다. 식물원 특유의 달콤한 공기와 유리벽에 부딪쳐 흐르는 작은 빗방울들의 모습, 그리고 낮은 자리로 흐르는 그윽한 커피향의 이끌림 속에 이경화 선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호스피스 봉사 시범사업이 연기되는 바람에... 20169월에 시작해서 20182월에 본 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또다시 연기되어 2019년도 9월에 하기로 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미 본 사업에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없는 상황이구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제가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초창기 멤버예요. 2014년도에 개원했을 때 입사를 했죠. 당시에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저하고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원래 호스피스에 관심이 있어서 초기에 입사하자마자 마하보디교육원에서 하는 생사의 장 교육(불교호스피스교육)을 먼저 받았어요. 그 때는 대학원에 들어오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죠


그런데 제가 병원에 계속 근무하던 중 2016년도에 우리 병원에서 호스피스 봉사 시범사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능행 원장 스님께서 호스피스 사업을 하는 사람은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 임상보디사트바교육)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마하보디교육원에서 CPE 교육을 받게 되었죠. CPE가 마하보디교육원 프로그램의 하나잖아요


그런데 CPE 교육을 받아보니 너무 괜찮은 거예요. 감동 받았어요. CPE 교육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몰랐던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을 스님께서 끄집어내 주시니까요. 그러면서 ", 이게 뭐지?" 하면서 이 분야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아, 한번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해서 마하보디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죠.



CPE 교육 프로그램이 기본과정, 전문가 과정, 지도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속 교육 이수를 하셨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시간이 없었습니다, 대학원 공부 때문에(웃음). 2, 3차 교육 이수는 안했습니다. 제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다른 공부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최초의 불교호스피스병원이기도 하고 제가 책임자니까 우리 병원 공동체 안에 있는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대해서도 알아야 되겠다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구요.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런, 대학원에 들어와 보니 이런 수준은 정말 도전이죠. 그런데 힘들지 않아요(웃음).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은 어떠셨는지요?


첫마음은 호기심이었죠. 여기서 무엇을 가르칠까? 들리는 소문에 다른 곳에서 하는 흔한 학문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제가 무엇을 파악해서 하는 성격은 아니라 일부러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외부에서 가르치는 공부나 이런 쪽은 아니고 마음, 자기를 알아가는 그런 공부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아주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내가 나에 대해 더 알 필요가 뭐 있어?’ 그랬는데 CPE 교육을 받으면서 제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쪽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뭔가를 가르쳐준다 하니까, 한번 해보자 하고 온 거예요. 호기심이죠.





지난 학기 학생회장으로서 학생회를 잘 이끌어 주시고 다음 학생회장에게 소임을 넘기셨는데, 소회 한 말씀 해주시죠.


작년 기수가 회장직을 넘기면서 우리 동기 세 명 중에 한 사람이 회장을 맡아야 했어요.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았거든요. 사실 부담감은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긴 하지만 어차피 주어진 일이니까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회장을 하게 되면 중간 이상만 하자,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서 그냥 받아들이고 한 거예요. 그것도 다 도전이에요, 저에게는.



그런데 선두에 서셨어요(웃음). 대학원도 그렇지만 입사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뭔가에 도전하게 하는 이곳에 머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맨 처음 제가 능행 스님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를 읽고 이 병원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병원이라는 곳이 다 조직이잖아요. 보통 조직에서 요구하는 것은 같아요. 그냥 일 잘하고 그러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곳은 뭔가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마음이라든지, 일 중심이라기보다는 환자를 어떻게 대할지, 사랑이라든가 케어라든가 하는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커다란 이유가 있어요. 우리 병원만의 임종의식이 있거든요제가 병원 생활을 오래 해서 알지만, 보통 병실에서 죽으면 시체가 바로 안치실 냉장고에 안치되잖아요. 일반 호스피스 병동뿐만 아니라 다른 병동에서도 무조건 그렇게 해요. 그런데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는 우리 병원만의 8시간 임종의식을 해요. 진정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품위를 지키고 돌아가실 데는 바로 여기밖에 없죠


다른 병원들은 경제적인 논리로 환자분이 돌아가셔도 8시간을 병실에 놔두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돌아가신 임종자가 침대에 계속 누워 계시고 가족들도 함께 계시면서 이별의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배려를 해드려요. 가족들로서는 8시간도 충분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시간에 배려를 해드리는 거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 나중에 사별 가족들의 감정이 조금 완화되는 것 같아요. 가족들이 간호를 하면서 계속 환자 곁에 있었다 해도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가시면 엄마~ 아빠~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바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는 그런 여운을 정리할 수 있는,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는 거예요. 제 석사 논문 주제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호스피스 병원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지켜보는 죽음 때문에 힘들어서 병원을 떠난다고 말씀하시는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가 않아요. 제가 받은 CPE 교육, 생사의 장, 대학원 수업, 이런 것들이 다 연계성이 있어요. 제게 힘이 생긴 거죠, 힘이. 저는 불교는 잘 몰라요. 그런데 이곳에 교육을 받으러 오는 교육생들은 불교에 많이 심취해 있으면서 깊이도 있고 그러시더군요. 저와 대화의 깊이가 다른 거예요. 처음에는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거, 단어도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뭔가 나아지겠지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공부를 계속 하면서 얻은 것이 있어요. 마음을 살피는 것, 가족뿐만 아니라 환자분들의 마음까지도요. 기술적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다가갈지 몰랐던 부분을 배우게 되니 도움이 되었죠. 그것도 힘이 된 거죠.


저는 환자분들을 보내드릴 때 보람을 느껴요. 사람은 누구나 죽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인데, 우리 병원에서는 너무나 존엄하게 돌아가실 수가 있다는 거죠. 저는 우리 병원에서 마지막 임종을 하시는 분들은 복 지은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가실 때스님들도 오시고 다른 분들도 오셔서 인간으로서 아주 품위 있게 돌아가실 수 있게 해주시잖아요. 아름다운 모습으로요. 다른 병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들이죠, 아름다운 환자들의 모습은


시신을 모시는 업체분들도 우리 병원에 오시면 엄숙해져요. 그분들도 다른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여러 번 모셔봤을 테지만, 여기는 다르거든요. 그래서 그분들도 처음에는 덜렁덜렁 왔다가 엄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우리 병원 그 부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횟수로 보면 제가 임종을 100번 이상 봤을 걸요? 한 분에 8시간씩이니까, 800시간 정도 되겠네요. 적지 않은 시간이죠. 거기서 배운 것은, 잘 살아야지라는 것이에요. 선한 마음으로, 내 이 선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잘 살아내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요. 끝도 괜찮으신 분이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현재 4학기 재학중이신데 그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저는 심플해요. MT 갔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웃음) 김경일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함께 우중산사 통도사에도 갔었고, 공룡 발자국 있는 데 반구대에도 갔었죠. 교수님과 학생들이 함께 MT를 가니까 친밀감도 확 느껴지고 좋았어요. 다 제가 학생회장일 때 간 거네요. 제 성향이 그래서인지 먹고 쓰는 것에 투자를 많이 했네요.(웃음)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가족이죠. 엄마 아빠는 다 돌아가셨지만 자매들 간에 우애가 정말 좋아요. 우리 자매들은 안 보면 안 되는 사이예요. 그리고 우리는 무조건 어디든 같이 놀러 다녀요. 남편 빼고 자매들끼리만 놀러다닐 때도 있고요.(웃음)



10년 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열심히 잘 살았네. 그리고 그 때도 여기서 일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 때는 나이가 있으니 길게 일할 수는 없겠죠, 젊은 사람들도 여기에서 일하고 싶어할 테니까요. 그래서 4시간 정도? 아니면 일주일에 3? 그리고 65세 정도 되면 그 때는 놀러 다녀야죠.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이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나 자신이죠. 표현이 다 되니까. 또 하나 있는데, “마음은 역마살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도 때도 없이 변하니까요.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경화도 (대학원) 다녔다. (웃음) 당신은 뭐든 해낼 수 있습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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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강민정 선님을 만났습니다.



유난히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정토마을과의 인연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셨고 졸업 이후에도 그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계신 대학원 졸업생 강민정 선님을 만났습니다. 바깥에서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이 태양빛이 작렬하는데 강민정 선님은 그보다 더 뜨거운 카푸치노 커피를 시키셨습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신 강민정 선님과의 데이트, 이제 시작해 봅니다.




반갑습니다. 올해 졸업하시고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지금은 좀 쉬면서 짧은 시간 잠시 알바 정도 하면서 그 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을 조금씩 보충하면서 지냅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입학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호스피스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토마을을 알게 되었어요. 거기에서 생사의 장교육을 받았는데 대학원도 있고 여러 가지 교육도 하고 병원도 있고, 제가 평생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다경 스님께서도 대학원 전문가과정을 권하셨고요. 저한테 많은 친구를 알게끔 해주시고 싶으셨던가 봐요. 그래서 생명전문가과정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갈 때 대학원을 나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의 끈을 만들고 싶었어요. 부산에서 거리도 멀고 그냥은 잘 안 와질 것 같은데,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 사람들도 알게 되고 뭔가 할일이 생기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갔었죠. 그런데 이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수업 과정에서 점점 제가 배우고 싶은 것, 내게 부족한 것을 더 배워야 되겠다 이런 계획이 서더라고요. 중간에 생명교육 과정으로 바뀌었는데 저는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임상전문가과정이든 생명교육전문가과정이든 저에겐 하나의 끈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대로 연결만 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힘든 일을 겪기도 하고 그러는데, 제가 자리를 잡지 못했었거든요. 제가 자꾸 방황하는 그런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제는 좀 방황하지 않고 뜰을 하나 만들고 싶고 정착하고 싶은 그런 욕구, 정토마을에 정착을 하고 내 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저는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제가 경험했던 것들에 대해 강연도 해보고 싶고 그랬는데, 그 방법을 모르잖아요. 너무 막막했었는데 생명교육전문가과정을 하면서 수업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의 기초 발판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면 부족한 부분이 뭔지를 알고 조금씩 체계를 밟아가는 단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지금 이 시간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항상 불만도 생기고 뭔가 어려움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산 너머 남촌이라는 말이 있어요. 제가 다른 데를 동경하면서, 아 거기는 나을 것이다, 지금 나 있는 곳이 가장 힘들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생명교육전문가 수업을 하면서 조금씩 성숙해졌다고나 할까요. 생각이 달라지면서, 제가 동경하던 산 너머 남촌 그쪽에서는 제가 있는 이 자리가 또 동경하는 산 너머 남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제가 이 자리에 처해 있는 이 공간이 가장 소중하고,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제가 뭐랄까, 살다가 굉장히 겪기 어려운 힘든 일을 겪었어요. 처음에는 아,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생길까 그랬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제가 너무 현재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자꾸 갈망하고이상만 자꾸 바라보고 쫓아가려고 하고, 그러다가 주변 사람이나 가족이나 누구를 마음 아프게 했던 것도 있고요. 이제는 내 현재 주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저쪽에서는 또 이쪽이 갈망하는 곳이 되는데 아무 소용없는 욕심을 제가 너무 많이 냈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요.

 

제가 또 말해주고 싶은 것은, 왜 누구나 펜도 독이 되고 말도 독이 된다고 하잖아요. 또 미운 대상도 있고 화나는 대상도 있을 적에 정말 울컥하기 전에 한번 잠시 멈추고 한번 더 생각을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사람을 대할 때 이 사람하고는 지금 이 대화는 마지막 대화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라고 하고 싶어요. 저도 가끔 안 될 때가 참 많은데, 정말로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이해되고, 아무리 밉고 화가 나더라도 지금 이 사람하고 안 좋은 말로 헤어졌구나, 마지막이 되었구나 이런 후회는 안 남게 해야죠. 항상 누구나 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현재 가까이 있는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산 너머 남촌하고 거의 같이 결부된다고 할까요

 

저처럼 가족을 먼저 보낸다는 건, 특히나 자녀를 먼저 보낸다는 건 그게 뭐랄까, 다른 문제는 몰라도 치유가 백 프로는 안 되죠. 끝까지 영원히 안 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걸 안고 제가 어떻게 생활하느냐 그것을 발판으로 또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 기억나시나요?

 

저는 처음에는 평범하게 시어머니 모시고 살림만 했고 그 다음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살다가 처음으로 저한테 투자를 한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직장, 살림 이외의 다른 세계에 들어와 보니까 굉장히 설레이기도 했고요. 몇십 년 만에 제가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친구들,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고 그런 것도 있지만 또 수업 중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그래도 포기를 안 하고 왔죠. 여기에서 좌절되면 이것은 완전히 실패다, 실패의 실패.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사실은 제가 걸어올 적에 울면서 내려온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동그라미 안에서 나와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한발 나와서 보니까 양쪽 다 보이는 거예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상처의 찌꺼기가 있어서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차차 하나씩 알아 나가는 것, 성숙해져 간다는 게 아마 이런 것 같아요.

, 그 말을 안 했네요. 처음 입학할 적에 제가 몸을 많이 혹사시켜서 많이 아팠었거든요. 처음에는 목디스크 때문에 목에 깁스하고 왔다가 다음 학기엔 손에 수술을 했고, 양쪽 다 했잖아요. 팔에도 깁스를 하고 오고. 그러니까 김경일 교수님께서 붕대 감은 위치를 헷갈려 하셔서 웃고 한 적도 있는데. 정말로 힘들게, 그렇게 힘들게, 그러면서도 걸어서도 오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보다는 많이 좋아진 겁니다. 지금은 붕대가 지금 없어요. (웃음)



돌이켜 생각해보시면 선배님께서 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겐 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거든요. 좋은 점은 도반들과 같이 수업하고 질문하고 이런 거죠. 저도 몰랐습니다, 수업을 하면서 제가 그런 거를 참 좋아하는구나, 토론하고 이런 거를 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같이 질문하고 그룹으로 하는 내용 있는 수업을 굉장히 즐거워했던 것 같아요. 너무 적극적으로 신이 나서 했죠. 그러니까 붕대를 감고도 걸어서도 가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질문을 하면서 터특한 게 있는데, 여러 사람이 딱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질문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잖아요. 시간 이런 것도 봐야 하고요. 옛날에 우리는 형제 간에 여럿이 있을 적에 다섯, 일곱 될 적에 생선 두 마리만 딱 올려놓으면 말 안 해도 자기 몫이 얼만지 알아서 먹었거든요. 그렇듯이 질문도 시간이 임박할 적에 제가 질문해야 될 몫이 얼마만큼인지, 그런데 정말 좋은 질문도 시간이 너무 늦었거나 다른 스케줄에 차질이 가는 질문을 하면 답변해 주는 분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 질문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거든요. 질문도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 교수님께 따로 개인적으로 해야 될 질문, 그런 것은 잘 판단을 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10년 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10년 후에는 제가 필요한 곳에서, 어디 조그만 단체 이런 데서 제가 겪었던 상처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현재의 우리 세대 제 또래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문제를 겪고 있을 것 같거든요. 아주 곱게 늙어서 단아한 모습으로 강의를 하고 싶어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아버지께서 굉장히 좀 긍정 마인드이세요. 가장 큰 선물이라 하면, 제가 아버지 긍정 마인드를 많이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이렇게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버지 긍정 마인드를, 그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 있지 않겠나. 생활에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하얀 도화지인 것 같아요. 그 도화지에 내 생각을 어떻게 그려넣느냐. 제가 좀 힘들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살았으면 그 도화지에 마음을 아주 부정적으로 그려넣을 것 같고, 또 이렇게 밝게 행복하게 살면 행복하고 밝은 마인드로 도화지에 색칠했을 것 같고. 그런데 또 잘못 그려졌을 때는 우리가 살면서 고칠 수도 있으니까. 마음은 한마디로 하얀 도화지다.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요즘 후배들이 워낙 똑똑하고 잘해요. 더 잘해요, 선배보다. 다들 알아서 잘 하니 특별히 제가 선배로서 말해줄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계속 노력하기를 잊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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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권기현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새벽부터 촉촉한 봄비가 잔잔히 내리던 날 오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행정업무를 지원해 주고 계신 권기현 교수님을 만나러 위덕대학교 대학원을 방문하였습니다.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두고 임시휴일로 지정된 날이어서인지 아무도 없는 대학원 교정은 모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침묵이 안개처럼 스며 있었습니다.


권기현 교수님 방에 들어서자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책장 칸칸마다 하나 가득 진열되어 있는 수백 개의 소형불상들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 동안 외국을 다니면서 그 불상들을 하나하나 모으셨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바리스타를 자처하시면서 손수 커피를 뽑아주셨는데 신맛이 강하고 향이 부드러워서 우리가 준비해간 마카롱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교수님은 마카롱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의 일가견이 있으셨습니다. , 이제 권기현 교수님과의 데이트에 동행해 보실까요?






교수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평소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는 늘 같은 시간이 반복되기 때문에 불편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 대학원과 위덕대학교 불교대학원 협약에 따른 행정업무를 지원해주고 계시는데요. 그림자와 같은 조력자로 늘 함께 해주시는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교수님과 우리 대학원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인연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웃음)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의 관계는, 일단 원장이신 능행 스님하고 장익 총장님이 원래 옛날부터 아시는 분들이었고, 그때 불교대학원 원장이 장익 현 총장님이시고 제가 불교대학원 주임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던 거죠. 여러 가지 수업들은 장익 총장님이 주로 해오셨고, 우리 불교대학원 수업으로는 김경일 교수님이나 그 외의 다른 여러 교수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저 같은 경우에는 행정적인 업무로 뒤에서 지원하는 그런 입장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행사 때마다 어쩌다가 참석은 했지만 실제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만나서 뚜렷하게 서로 대화하고 홍보하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뭐랄까 그림자 같은 사람(?) 그림자는 아닌데... 조력자이기도 하고, 실제는 그것도 아닌데... 뭐 조력자라고 해야겠습니다. (웃음) 처음부터 제가 주임교수로 지금까지 해오고 있으니까요.

 

교수님,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 석사 수업 받을 때 교수님께서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도를 해주셨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기말 세미나 발표도 하고 그랬었죠?


. 그렇지만 논문 발표라든지 세미나라든지 할 때 이렇게 보았지 직접적인 수업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서 실제 뭐랄까 얼굴만 알지 인간적이거나 아니면 학문적인 거나 하는 경우는 사실 적었죠. 몇 번은 행정적인 지도교수를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수업을 같이 하면서 학생들하고 만나고 해야 하는데, 교수와 학생들의 매개체라고 하는 것은 수업인데 수업이 같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어요. 앞으로는 수업을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생겨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좀더 저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고 학생들도 저뿐만 아니라 위덕대학교에 대해서 좀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 교수님 기대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산과 같은 고비를 만나게 되는데요. 교수님께서도 여러 고비가 있으셨겠죠? 교수님께서 삶 속에서 가장 큰 고비, 이런 것들이 있으셨나요?


큰 고비라고 하면 좀 그렇고, 작은 고비들은 좀 있었죠. 어려움. 고비들이라 하면 어려움들인데,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 교수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 교수 되기 전에 상당히 많은 어려움들을 겪는 부분들이 많죠. 저도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왔기 때문에 오자마자 상당히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었죠. 뭐 저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도 저와 같이 유학을 갔다 오고 대학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그 때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로 교수가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좀 많았죠. 교수를 포기하려던 생각까지도 했었고. 현실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었죠. 그 다음에는 강사 시절인데, 대부분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외에 인간적인 상황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큰 어려움들은 없었습니다.

 

교수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실 수 있었나요?


크게는 없었죠. 운이라고나 해야 될까요. 사실상 어떻게 보면 내적으로는 그때 포기를 했었습니다. 다른 쪽에다가 간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그때 마침 저쪽에서 제 자리를 만들고 있었죠. 제게 불교 일을 하는 것은 일정한 것이었고 그곳도 불교일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시점에서 학교에 자리가 나서 제가 위덕대학교에 머무르게 되었죠. 크게 힘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저의 큰 것은 불교 일을 계속적으로 하는 거고 다른 것을 했어도 비슷했을 거예요. 또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좀 뭐랄까, 대학 다닐 때부터 교수가 꿈이라고 할까 희망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마음속에 있고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사실 저는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연구원 정도만 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고 그때는 결혼도 하지 않아서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 이제 공부하는 거 괜찮다 했는데,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출가하는 걸 보니까 다들 괜찮게 사시더라고. 그래서 , 나도 저렇게 출가도 언제든지 가능하구나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또 우연히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고 나면 또 출가를 할 수 없으니까 이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죠. 생활인으로서 살게 되면 현실적인 경제적인 거나 사회적인 거나 삶에서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힘들었죠. 그건 저뿐만 아니라 교수 된 사람들의 거의 70프로 이상이 아마 그런 과정들을 거의 다 겪고 있는 것으로 저는 압니다. (웃음) 제 주위에 있는 교수님들 거의 다가 그렇죠. 한 두서너 분 빼고는 제가 못 봤습니다. (웃음)

 

그 때 교수님이 안 되셨으면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법사 하려고 했어요. 교수 하려고 했는데 교수 되기가 어려우니까 법사라도 하려고.. 불교를 버릴 수는 없으니까 불교계의 법사가 되려고 했죠.




교수님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인가요?


제 딸들이죠. 제가 받은 선물을 말씀하시는 것 맞죠? () 딸이 둘입니다. 와이프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물이라고. 요즘에는 와이프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는 시대지만 실제 마음은 딸들인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잘한 일도 오히려 딸 두 명 키운 일인 것 같아요우리 불교는 무소유고 세간의 삶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쨌든 결혼을 했고 자식을 얻고 했어요. 단순한 자식과 부모의 관계보다도 제가 어떤 사람들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딸들이기 때문에, 제가 또 자식을 키우면서 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식을 통해서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느꼈던 그런 것들이 선물로 생각되죠. 만약에 제가 출가를 했다거나 결혼을 안 했으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의 부모님이 저를 키워주신 것에 대해서도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자식을 통해서 세상을 많이 알게 된 그것이 세상의 선물 중 하나겠죠. 그리고 불교 공부하는 데도 도움이 크게 됐고요.

 


교수님께서 세상에 남기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가요?


불교학자로서는 그렇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제 딸들이 불교 공부는 안하지만 불교적인 삶을 살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불교의 근본은 욕심을 덜 내는 거니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욕심을 자제하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수님이 그리는 앞으로의 모습은요?


제가 위덕대학교 교수로 있는 이상은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학생들을 위해서나 학교를 위해서나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사실 인도에서도 브라만 4주기라고 있는데 그 마지막은 세간을 떠나서, 산야시(Sanyasi)라고 해서 떠돌아다니는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돼 있어요. 지금 우리 불교 입장에서 보니까 브라만 4주기를 타종교의 삶의 방식처럼 생각하는데 실제 불교도 그런 삶에 근거돼 있어요, 마지막에는


사실상 방금 딸 이야기나 생활 이야기도 했지만, 그게 또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한다는 그런 거. 가족들을 위해서 절제 아닌 절제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계속 길을 떠나는 것처럼 출가 아닌 출가의 그런 삶, 그렇게 해서 제가 세상이 좀 궁금한 것들에 관해서 방랑? 만행? 등의 삶을 살고 싶고요. 좀 더 넓은 세상, 바깥에서 제가 뭘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거죠. 제가 또 이때까지 학교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면 잘 못살 것 같아요. 그래서 외국에 가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서 어떤 공부를 하고 싶고요. 그건 또 건강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좀 이렇게 제가 아직도 모르는 불교, 늘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제가 그렇게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던 그런 분야에 관해서 혼자 어쨌든 해야 되는 길이므로 그런 것들을 좀 더 추구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죠.


 


마지막으로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도 경험하고 있지만 불교를 흔히 종교적인 의미로서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 자신의 수행적인 부분도 있고, 다른 여타한 부분들이 많은데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해야 하는 거죠. 부처님과 동격인 사람은 변할 게 없을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은 그 가르침을 받들어서 스스로 변화하고 그 변화를 남들에게 삶으로서 전달해 주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죠


특히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상담이라거나 남들에게 그런 삶을 전이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더 내 삶의 변화, 지식적인 차원보다도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건 공부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또 대담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처럼


다만, 본인이 먼저 어느 정도는 성숙되어야 하죠. 완전한 성숙이 아니더라도 내가 거기서 감동받고 변화를 느끼고 나서 남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하면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은 순수 학문적인 부분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그런 부분들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교수님, 우리 웹진 마음의 공식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우리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행동인 것 같아요. 마음을 마음으로 알기가 어려우니까 행동을 통해서 그 마음을 유추하는 거죠. 그 행동이 바르고 옳다고 하면 그 마음이 옳은 거고 행동이 옳지 못하면 그 마음이 잘못된 마음이 아닌가, 전도된 마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되네요.

 

교수님, 긴 시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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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수복 선님을 만났습니다.

 

봄 햇볕 따스한 토요일 오후, 배움의 열기가 뜨거운 대학원에 졸업생 이수복 선생님께서 양손 가득 간식을 사들고 방문하셨습니다. 선배님의 깜짝 방문에, 맛있는 간식에, 학생들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피어납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수복 선생님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묻고 싶었습니다. 마음과 이수복 선생님의 데이트에 동행해 보실까요?


 

드디어 졸업하셨습니다. 논문 쓰신다고 바쁘셔서 오랜 시간 잘 뵙지 못하였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진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재가요양 보호기관 운영을 하면서 석사 논문 준비를 한다는 것, 두 가지 큰일을 병행한다는 게 참 쉽지가 않았어요. 이제 지나고 보니 내가 그 기간을 참 열심히 잘 살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논문에는 만족하시나요?


만족이라 할 게 있겠습니까? (웃음) 만족보다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것 같아요.

 


교수님들의 칭찬이 참 많으셨어요. 현장에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담아내었다는 말씀들이 있었어요. 의미 있는 논문이라는 생각에 굉장히 반가웠는데요. 그런 부분에서는 만족하시나요?


제가 장기요양기관 사업을 2008년도부터 시작했어요. 올해로 10년째에 접어드는데요, 요양사업의 성공 유무라든지, 어르신의 서비스 질은 오로지 요양보호사분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피부로 많이 느끼게 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요양보호사의 감정노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요양보호사의 컨디션에 따라 캐어가 달라지기 때문에 대상자를 위해서는 요양보호사들에게서 사랑의 에너지가 충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석사 논문(자애명상이 재가 요양보호사의 자아 존중감에 미치는 영향)을 준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8주간 자애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정말 이런 힐링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요양보호사분들의 말씀을 많이 듣게 되었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더욱 이러한 프로그램이 논문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으로 꾸준히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통해 저는 그러한 부분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우리 대학원을 선택하게 된 첫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선은 제가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에 인간의 고통, 질병, 늙음, 괴로움의 근원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있었어요. 의료현장은 주사 놓아주고, 약주고... 어쩌면 겉치레적인 치료만을 해주는데, 그런 치료는 환자를 돌아서면 다시 돌아오게 하거든요. 단골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치유가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이 고통의 근원을 찾아봐야겠다 싶었고, 그 근원 자리는 뭘까? 생각해 보니 자기 내면의 어떤 명상,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것들을 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서 찾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던 중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신입생 모집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고, 그걸 보는 순간 제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내가 찾는 게 바로 이것이다이런 공부를 하면서 자기 마음자리를 지켜보면서 장단점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조절해가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고, 괴로움, 질병에 대한 것 또한 어느 정도 조절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대학원과 함께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요?


새록새록 기억들이 나죠.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걸 뽑자면, 진경스님의 사띠명상 수업이에요. ‘, 정말 명상이란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집중한다는 게... 수많은 잡생각이 끝없이 일어나면서 명상에 깊이 들어간다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나 자신이 생각도 많고 산만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차분히 싸띠를 깊이 있게 하려면 걱정근심을 없애야 한다는 걸 느끼게도 해주었던 수업이었죠.

 


진경스님 수업이 과제도 많았고 굉장히 힘든 수업이었다고 학생들이 그랬고 선배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지나고 보니 그래도 사띠명상 수업이 가장기억에 남는다는 말씀이시네요?


뭐든지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힘든 만큼 얻는 게 분명 있어요. 등산할 때 너무 힘들어서 돌아 내려가고 싶고 쉬고 싶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 정상에 오면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잖아요? 공부도 그런가 봐요. 힘들지만, 힘든 만큼 많은 얻음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답을 찾았습니다. 학생들이 힘들다. 하면, “견뎌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선배님의 말씀을 전하면 될까요?(웃음)


네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감추어진 이면을 한번 생각해 봄이 좋습니다. (웃음)

 

공부를 해 오신 그 시간 안에서도 어려운 고비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어려운 순간이 있으셨다면 어떤 순간이었고, 또 극복되셨는지? 극복이 되셨다면 어떻게 극복을 하셨는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금요일 수업과, 토요일 종일 수업을 들으러 온다는 것? 직장과 가정과 학교를 양립한다는 것 자체가 힘듦이었죠. 그래도 또 가장 힘들었던 때를 말하라면 2학기 때였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6명의 교수님이 계셨던 것 같은데, 그 학기에는 모든 교수님이 리포트과제를 내어주셨어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직장이 70% 학교가 30%라고 생각하고 다녔었는데 그 당시에는 과제가 너무 많아서 직장이 30%밖에 안 되고 리포트 공부에만 70%의 시간을 쏟다 보니까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 학교를 조금 보류해야 하나? 하는 갈등까지 하게했던 학기였거든요. 그렇지만 분명한 건 궁극적으로 이곳에서 배움을 통해 얻는 기쁨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반드시 졸업하고야 말겠다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중간에 포기하면 시작을 않은 만 못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죠. 이렇게 졸업까지 하게 되었네요.

 


2학기가 사띠수행이 있던 학기 아닌가요?


맞습니다. (웃음)



선생님께서 앞으로 그리시는 모습이 있으신가요?


저는 학문이 학문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학문이 살아있으려면 삶에 접목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나 스스로 반추하면서 수행에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지금까지 열심히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에 대한 보답이고 또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동안 공부했던 이력을 가지고 몇 군데 이력을 내어서 강의를 뛰고자 하고요. 좋은 인재가 있을 때 학교에 소개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저는 명상센터를 하나 열고 싶다는 꿈이 있거든요. 현대인들은 정말 너무 바쁘게 사는데 뭣 때문에 바쁘게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요.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공간을 통해 잠시나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앞으로의 소망입니다.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실 수 있을까요?


마음이라는 주제는 요약할 수도 있겠지만, 밤을 새우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끝이 없을 커다란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저는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마음이란 요술쟁이이고 마법사인 것 같습니다내가 마음에 미소를 상대에게 보내면 상대방도 나에게 미소로 화답해 주더라고요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뭔가 좋은 에너지를 보내면 멀리서도 그 마음을 느끼고 또 마음을 보내주는 힘을 느끼면서 마음이란 정말 마법사고 요술쟁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간단히 부탁드려요.


꾸준히 하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처음에 세웠던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냥 꾸준히 성실히 늘 나의 목표를 잊지 말고 쉬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급하게 가지도 말고, 차근차근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생각했던 어떤 위치, 목표에 올라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양손 가득 후배들을 생각하며 준비해 오셨을 선배님의 간식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며, 신입생으로 앉아있던 때가 엊그제 같다며 추억에 잠기시는 이수복 선생님의 눈빛에서 달달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앞으로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강의를 뛰고, 명상을 하고, 제자들을 이끌고 대학원에 방문하실 그 날의 선생님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수복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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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지금만나러 갑니다.



김원식 선님을 만났습니다.

 

2017년 연말이었습니다. 1229일 오후, 한적한 카페에서 대학원생 김원식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2년의 배움을 마치고 졸업을 앞두고 계신 김원식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김원식 선생님과 처음 마주앉은 시간, 그 이야기에 함께 귀 기울여 보실까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명상을 하면서 명상을 세상에 알리고 조직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명상을 통한 경험들이 참 좋은데, 이 좋은 걸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거죠. 어떤 사람들과 하면 좋을까? 그러면서 병원환자분들과 해보면 좋겠더라구요. 그렇게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알게 되었어요. 입학은 16년도에 했지만, 대학원을 안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지요.

근데 그때는 아직 대학원이 활동영역이 넓지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 공부를 조금 더 해봐야겠다 하고 미얀마에 가서 수행도 하고 그러면서 차일피일 입학을 미뤘던 게 3~4년 된 것 같아요.

 


입학 전까지 긴 틈이 있으셨네요. 선생님의 시작점을 다시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을 지나면서 안 하실 수도 있으셨는데, 3~4년이 지난 후에 입학을 결정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명상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저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가 그렇게 만만한 직장은 아니란 말이에요. 퇴직하기 전 관리자로 있을 당시에 보면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노동강도도 높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에 너무 많이 휘둘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었었죠. 스트레스가 많다보면 안전사고도 그만큼 일어나고 나 또한 그 현장에서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고충이 충분히 느껴지니까요. 이 사람들에게 명상을 통해 일깨움을 주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현대중공업 동료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집니다. 나와 같은 스트레스와 어려운 현장에서 사고로 이어지는 그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네요. 그러한 시도들이 이루어 졌나요?


2000년도에 명상동호회를 조직해서 15명이 같이 명상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렇게 진행되던 중 12년도에 제가 퇴임을 하게 되었고, 멤버들도 나도 회사를 떠나서 각자의 일을 하고 현대중공업도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상황들이 어려워지고 하니까 흩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정기적으로는 못하고 간혹 이벤트성으로 같이 만나는 정도로 지내고 있어요.

 



일과 동료에 대한 사랑이 많이 느껴집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셨을때의 첫 마음은 어떠셨나요?


참 좋았었죠.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곳에서 공부를 정리하며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고요,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실제 명상은 많이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상담시간은 많았지만 명상은 특강형태로 맛을 보는 정도인데. 그 정도로 명상을 했다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대학원 학습과정 안에서 명상실습까지 진행된다는 게 쉽지가 않죠. 그 시간을 대학원 안에서 가져가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요. 그것을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서 명상스터디 같은 소조직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케이! 그거예요. 내가 제안하고 싶었던 것은 강의실 정도의 공간만 확보된다면 그런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대학원은 언제든 공간을 지지할 생각이 있고요. 그런 부분에 서포트할 준비는 되어있으니까요. 선생님의 바람처럼 학생들 사이에서 그러한 요구들과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이제 졸업을 앞두고 계시는데요, 공부를 하시면서 힘들거나 어려운 순간은 없으셨나요?


딱히 힘든 건 없었는데결과를 만들어서 기간내에 제출해 달라든지 하는 과제들 같은 경우에는 조금 신경을 써야 하니까 부담들이 조금 있었다 뿐이지 다른 힘든 건 없었어요.(웃음)

 



공부를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사실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새롭게 와 닿았어요. 기본적으로 배움을 얻겠다라는 마음가짐과 즐기고자하는 마음이 가장 컸으니까 매 순간들이 상당히 재미있고 즐거웠거든요더군다나 인간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들에서 , 내가 살아오면서 형식에 치우친 만남만을 가져왔구나.’ 하는 것들을 많이 느끼게 되었고, 앞으로는 마음으로 교감되는 진짜 만남을 가지며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이번에 인도 의료봉사를 다녀오셨는데요, 어떠셨나요?


저에게는 어쩌면 졸업여행에 가름 안 되겠나 싶어요. 새로운 경험 새로운 환경을 접함으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앎들을 얻을 수 있었죠. 생각보다 그 일정이 만만치 않더라구요. 봉사를 하겠다는 의도들이 모여서 뭔가 큰 움직임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 좋았고요. 붓다팔라스님이 인도 불교 부흥을 목적으로 대탑 가까운 곳에 선원을 세웠다는 그 장소 자체에 대한 놀라움도 저에게는 있었어요. ‘인도라는 어려운 나라에까지 와서 이렇게 애쓰시는구나.’ 했죠.

 


충격이라 말씀하신 것들이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나요?


영향이라기 보다는 내 삶에 힘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 이제 나도 살만큼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내가 살아오면서 얻었던 것들을 어디에든 베풀고 기여해야겠다는 마음들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들이 일상에 묻혀 살아가다 보면 작아지고 희미해진달 말이예요. 그런데 이번 같은 의료봉사처럼 외부적 낯선 충격을 통해서 그런 마음을 다시 뒤집어보고 강한 의지를 다시 내어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2017년도는 선생님께 어떤 해였나요?


퇴임을 한 후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해였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어떻게 삶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 해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하니까 지금까지 해온 공부를 토대로 전국을 다니면서 취약계층에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면서 나머지 여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제시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그려봅니다.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 우리가 하는 공부는 좋은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마음이란 건 좋은 마음일 때가 진짜 마음이다. 좋은 곳으로 그 마음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커갈 수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교육 전문가과정의 입학을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또 앞으로 들어오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즐겨라. 즐기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랬을때에 모든 배움이 나에게 마음으로 채득되는 것이지 즐기는 마음없이 뭔가를 얻어보겠다고 아둥바둥 해봐야 얻어지는 것도 없을 뿐더러 공부하기가 매우 어렵다. 마음을 내려놓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따뜻한 식사 한 끼를 함께하고 싶었지만, 인터뷰 후에 잡혀 있는 NGO 공존 활동가들의 교육프로그램 회의로 인해 차 한잔으로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연말에 귀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원식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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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손재선 선님을 만났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평일의 오후, 대학원생 손재선 선생님과 카페에 마주앉았습니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르도록, 이렇게 마주앉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새삼 아쉬움이 되어, 오늘의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가을, 참 만나고 싶었던 손재선 선생님과의 데이트에 함께 동행해 보실까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 입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그 당시 어머니가 편찮아지시기 시작하셨어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어머니가 거동을 하셨고 곁에 붙어서 케어를 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었어요. 저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15년 직장생활의 여독을 풀어보고자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20년 가까이는 그냥 회사, 조직을 위한 일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개인을 위한 것 보다는 사회를 위한, 세상을 위한 일들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사실 저는 제 3세계나 그런 해외봉사 쪽으로 관심이 많았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나가서 활동을 좀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아프시기 시작하고 내가 케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노인케어쪽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렇게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1년을 놀며 쉬며 공부하고 하던 사이 엄마가 허리골절을 2번을 당하시고 6개월을 와상상태가 되신 거예요. 제가 쉬는 상황이었으니까 엄마를 돌보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그렇게 돌봄을 해야 하는데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하지? 요양보호사 공부를 할까? 온갖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제가 사진을 배웠던 선생님이 신문에 남기신 칼럼을 보게 되는데, 호스피스를 하다가 임종을 하셨다는 이야기 였어요. ‘아 호스피스란활동이 있구나.’ 그 기사를 보고 이쪽을 찾아보고 그렇게 호스피스교육 기관을 찾게 되었어요. 그렇게 2년 전 여름에 호스피스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렇게 이곳과 인연이 닿았지요.

 

 

그럼 호스피스교육을 하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는 어떻게 입학하시게 되신 건가요?


호스피스교육 마치고 병원 영적돌봄연구실에서 봉사활동을 계속 했어요. 그렇게 능인스님께 지도 받으면서 계속 공부를 했고, 호스피스교육 후에 이어지는 교육들(임상기도, 임종의식)을 계속 받았고, CPE교육까지 쭉 연결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이쪽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불교에 관해서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죠.


엄마가 독실한 신자이기는 했지만, 저는 어릴 때 엄마 따라 절에 몇 번 갔던 기억이 전부였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반야심경은 제가 외우고 있더라구요. 불교 공부를 시작하고 반야심경 강의를 들으면서 , 불교의 진리가 이런 거구나.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 그 마음이 또 저에겐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곳에 와서 스님과 환자들과 임상에서 공부하고 계속 연결 연결되면서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고,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물었고, 환자를 돌보고 또 어차피 부모님을 돌보고 만나야 한다면 내가 나를 더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심리와 명상쪽에 관심을 두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어디로 갈까? 서울에 갈까? 경주에 갈까? 고민 중에 능인스님과 이야기했고, 결국엔 임상을 함께 할 수 있는 이곳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입학할 때의 첫 마음, 초심이 궁금해요.


어떤 마음이었는지 특별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좀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교, 명상, 심리 이 세가지를 다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입학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우리 대학원이 공부하는 양이 보통 많은 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을 하실 때에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으셨구나 싶어요.


이렇게까지 많을 줄 몰랐어요. (웃음)

 

벌써 5학기를 앞두고 계셔요. 지금 마음은 어떠셔요?


1~2학기 두 학기는 정말 멋도 모르고 지나간 것 같아요. 공부를 한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바빴어요. 카페 일도 해야 했고, 수업시간에 2/3은 거의 잔 거 같아요. 그럼에도 잠결에 흘러들어온 것들이 있었던가 봐요.


사실 반야심경밖에 모르는 사람이 앉아서 유식을 듣고 있자니 이게 뭔소린가 싶고 이건 진짜 기초 공부를 해서 받아야 하는 수업인데 기초가 없는 내가 이렇게 받고 있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그래도 한 가지씩은 제 마음에 남더라구요.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는데, 기말 세미나 때 발표를 한 후에 장익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보살은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되면 해탈하고 열반하고 다시는 이 세계에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갔다가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시 온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말씀이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더라구요.


그게 진정한 보살의 길이지, 나 혼자 해탈하고 열반하는 건 보살이 아니다. 진짜 보살은 다시 중생을 구제하러 온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에 보살로 와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지 모른다. 관세음보살님이 다시 구제하러 오셨듯이(웃음) 그 말씀 하나가 남았어요. 1학년을 그렇게 지나다보니 2학년이 되면서 , 내가 공부를 정말 안 했구나.’ 싶어서 진짜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마음을 내었고, 그러면서 2학년 2학기 들어서면서, 나름 책도 보고 하다보니 이 분야가 정말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구나.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끼기도 했고요. 힘들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그런 분야들을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차차 알아가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 사람을 보는 관점이 또 넓어지고, 뉴스들도 관심있게 보게 되고, 지식이 늘지는 않아도, 제 관심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 이것이 굉장히 좋았어요.


 

사회적인 관심, 사회적인 문제, 사회적인 활동들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이 굉장히 반갑게 들려요. 이제는 정말 이 분야에서 빛을 발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다시 돌아보니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 성격상 100% 자의로 그만두지는 못했을 거예요. 12시간 이상씩 일을 하며 30대를 보냈거든요. 너무 힘들고 벗어나고 싶은데 그걸 그만두지 못하는 거예요. 존재의 불안감 때문에요. 이걸 놓아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근데 그 당시 지방에 있던 회사가 경기도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갈까 말까 고민하던 중 더 이상은 안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만두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100% 자의는 아니고, 외부의 영향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영향도 큰데, 어쨌든 잘 한 선택을 했구나 싶어요. 그런 요인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아직까지도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면서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메고 있었을지 몰라요.

 

 

인생의 고비가 있으셨나요?


저의 고비는 5년전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신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아요. 현재도 그렇고요. 엄마가 파킨슨 병이세요. 처음 그 병을 진단 받았을 때는 왜 이런 병이 우리엄마에게 왔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자책감이 찾아오면서 힘들더라구요. 사실 공부는 그러면서 시작된거 같아요. 마음공부 하는 것도 그렇고 명상이나 이런 쪽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그때 상황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데... 그런 힘듦, 내지는 슬픔 어려움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어요? 극복이라기보다 그때그때 어떻게 넘아가고 계시는지요?


엄마가 아프시고, 아버지도 원인모를 폐혈증으로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살아 나오시고, 한 최근 3년 동안을 두 분이 번갈아가며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는데, 그런 상황들을 이겨왔다 하기에는 거창하고 그냥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던 것 같아요. 병원에서 케어를 해야 하면 언니 오빠들과 순번을 정해서 하고, 병원 봉사를 하고 불교 공부를 하면서 매일 아침 108배 기도를 시작한지 600일 정도 되는데요, 그 힘을 통해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게 아니었으면 부모님을 케어하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중간에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 대학원의 공부과정들도 과제가 많고 생명교육 전문가과정으로 바뀌면서 또 새로운 분야이기도 하고, 이론교육도 많고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또 간호 공부를 하고 계시잖아요? 그게 연결선상인가요? 어떻게 그 공부를 병행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심리적인 케어의 치중이 많이 되는데요,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병증이나 우리 신체적 몸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장기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거예요. 근데 돌봄을 하려면 환자의 몸을 만지게 되는데요, 환자의 배를 만지거나, 어느 부위를 만질 때 이곳에 어떤 장기가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이 환자가 어떤 병증이 있는지를 알면 이곳을 만져도 되는지 안되는지 이 정도는 나도 알아야 될 거 같았어요.


그리고 향후에 이쪽에서 제가 임상의 실무적인 일들을 더 깊이 하게 된다면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가장 빠른 길이 간호공부더라구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10년 뒤에 선생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은 병원에서 일을 할 수도 있겠구요.

제 꿈이 있는데, 역량이 된다면, 대규모 호스피스 시설 보다는 가정형 센터를 제대로 한번 운영해보고 싶은 그런 꿈은 가지고 있어요. 그런 활동들을 하고 있는 저의 모습들을 그려봐요. 그리고 제가 배우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들을 지인들과 환자들을 돌보고 또 일반인들도 같이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런 꿈을 꿔요.(웃음)

 


인생을 살면서 최고의 선물이 무엇이었을까요?


엄마 아프기 시작한거요.(웃음)


 

공감이 되네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세상에 무엇을 선물로 남기고 싶으세요?


없어요. 저는 그냥 살다 그냥 가고 싶어요.

 


선물을 받았으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말이죠(웃음)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다가 사라지는 것. 쓰레기를 남김없이 잘 사라지는 것. 그것이 곧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선생님이 생각한 마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글쎄요. 마음이란 답이 없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웃음)

 


새로 들어 올 후배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 함께 공부를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수업시간에 설사 자더라도, 어떠한 한 마디는 귀에 남는다(웃음) 그러니 자더라도 학교에 와서 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웃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함께하고 싶었지만, 따뜻한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손재선 선님과 아쉬운 이별을 했습니다. 늘 진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오늘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고도 넓은 손재선 선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왠지 그 마음이 어떻게 자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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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김수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보슬보슬 여름비 시원히 내리던 광복절 연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병동 봉사를 오신 김수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김수필 선생님의 마음과 만나는 시간, 함께 동행하실까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생사의 장 불교호스피스교육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2015년도 여름 41기 교육을 받았고, 그 후에 봉사를 꾸준히 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능인스님께서 대학원을 추천해 주셨고요.


사실 저는 대학원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거든요. 굳이 대학원 공부까지 해야 하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능인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에게도 어떤 계기가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렇게 도전하게 되었던 거죠.


 

계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천에 의한 계기가 마련이 되신 경우네요, 입학하셨을때의 첫 마음이 궁금합니다.


우선은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이 좋았어요. 전에도 불교관련 공부를 했었는데 그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제가 모르던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리고 보통 대학원은 금요일 수업이면 끝나는데 토요일에 와서 또 플러스된 교육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공부 량이 다른 대학원에 비해 많은 것에 대해서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으셨어요?


... 저는 그렇지는 않았어요. 금요일에 집에 안가고 여기서 자고 토요일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시간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호스피스교육 스탭, 병원봉사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들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43기부터 스텝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스탭으로서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45기 생사의장 교육 때에는 학생 곁에 선생님이 늘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이번교육에 학생지원을 선생님이 맡으셨나보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보건교사이다 보니까 의약품관련해서는 담당을 하게 되었구요. 특별히 학생지원 소임을 살지는 않았어요. 누가 아프다고 약을 요구하시면 후에 지금은 상태가 어떠신지, 살피고 한번 물어봐도 주고 그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그렇게 보여지지 않았나 싶네요.^^

 


사실 이번 교육접수를 하는 과정에서 본인 건강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사실 우리 행정실은 교육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는 교육생들이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교육을 마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하거든요. 굉장히 그런 부분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지금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그러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챙겨주신 선생님이 계셨으니까 안전하게 교육이 진행될 수 있었구나 싶어서 새삼 감사함을 느낍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기분이 좋네요.(웃음)


 

그런 스탭으로서의 일이 선생님께 어떤 도움으로 다가오시는 거죠?


교육생의 마음을 살피는 것? 사람을 살피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구요. 봉사와도 연결이 되는데요, 봉사는 세심함이 필요하잖아요. 환자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 것이 환자를 더 편안하게 하는지, 손짓 몸짓 표정 그런 것들이 세심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자비심 보리심 그 마음들이 생겨나는 건가요?


그런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면 좋죠. 근데 저는 그런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이거든요. 자비심 자애심 이런 것이 제 마음속에는 별로 존재하지를 않아요. 근데 봉사를 하는 것에는 그런 마음들이 반드시 필요하죠. 모든 중생이 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봉사에 있어서는 꼭 필요해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그 마음에 이미 자비심이 자리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가요?(웃음)

 

 

병원봉사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2층에 계신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로 시작했어요. 봉사활동을 하면 환자를 만날 때의 마음가짐, 대화법, 그런 것들을 관찰일기로 쓰라고 하셔요.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환자의 반응은 어땠는지 그렇게 관찰일기를 쓰면 능인스님(영적돌봄연구실장)께서 보시고 피드백을 해주시거든요. 이런 때에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다 이런 말씀을 해주시죠. 그리고 나의 느낌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의 느낌이 잘못 들어가면 환자가 거북할 수도 있기 때문에 환자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 이런 것을 교육 받으니까 환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작년부터 호스피스병동 봉사를 하고 있는데요.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들어가고 있어요.


 

호스피스 활동을 하시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생사의 장 교육을 마치신 분들도 계시고, 대학원생 분들 중에서도 아직 봉사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봉사를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하나에 팁을 알려주신다면요?


우선은 봉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고요, 그 다음이 시간이겠죠? 시간이 안 된다면 사실상 봉사를 하기가 어려워요. 안되는 시간을 억지로 내게 되면 봉사가 잘 될 수가 없거든요. 내가 편안한 상태로 환자를 만나야지만 환자도 편안해하는데, 내가 불편하고 힘든 기운으로 들어가게 되면 환자에게 그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되거든요. 시간이 되고 마음을 낼 수 있을 때 천천히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서두르지 말고요.


그 조건이 되어야 꾸준한 봉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능인스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셔요. 굳이 많이 자주 오려고 하지 말아라. 지치게 하지 말고, 한달에 한번, 두달에 한번이라도 꾸준히 오면 된다. 그 말이 봉사를 시작하려는 분들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제 3학기를 마치고 4학기를 앞두고 계시는데요, 공부를 하시면서 힘들거나 어려웠던 순간들은 없으셨나요?


관심을 가진 분야의 수업은 쉽게 다가오는데 그렇지 않은 과목은 아무래도 지루한감이 있어요. 그래도 배운다는 입장에서 참여는 하는데, 사실 저에겐 생명교육 분야가 좀 흥미에서 떨어지는 부분이예요.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은 굉장히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 같은 경우에는 직업자체가 보건교사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윤리 이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있고 좀 신선하지가 않은 부분이 있죠.(웃음) 그래도 1학기에서 이론을 마쳤으니까 2학기는 그런 점들이 좀 해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일단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고 싶고, 바램이 있다면 남에게 쓰임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살다보니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산다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라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삶을 사는 것이 좋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봉사하면서 나름대로 깨어있는 삶을 살다보면 제 삶의 마무리 또한 아름답게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신다면요?


내 것인 것 같은데 결코 내 것이 아닌 것이 마음인 것 같아요. 그것을 찾아야하겠죠. 이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살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배움의 길을 함께 하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도반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도반들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 들어오시는 후배들을 통해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사람관계에서 배워지는 것이 실은 수업을 통한 배움만큼 많거든요.

다른 사람의 질문들, 내가 생각하지 못 했던 사고방식들, 그런 것들이 참 좋아요.

그리고 어떤 공부일지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꾸준히 공부합시다.^^

 

나에겐 자비심이 없다는 김수필 선생님께 모르고 행하는 자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모르고 행하는 선한의 공식 : 마음=Real 자비심=김수필 선생님의 마음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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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장익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살이 따끈한 오늘, 웹진 마음은 장익 교수님을 뵈러 경주 위덕대학교로 향합니다. 장익교수님의 마음을 만나러 가는 길, 함께 동행하실까요?

 

 

교수님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운명처럼 능행스님을 만난거지. 그게 아마 80년대 후반쯤 될까?


스님은 굉장히 학술적이고 공부에 진지한 분이셨어요. 그때 제가 조계사 불교대학하고 대원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그 두 군데를 다 와서 공부를 하셨어요. 그래서 인상 깊게 스님을 보고 있었고요. 결정적인 만남은 그 후 10년쯤 뒤였어요.


뭐랄까... 괴로운 일이 운명을 바꿔주는 계기가 되는 경우들이 있잖아요. 그때 저희 아버님이 진찰을 받았는데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어요. 저는 그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데, 병원에서는 더 이상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는 거예요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부터 공부를 했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케어라든가, 암환자에 대한 호스피스라든가 하는 그런 개념이 전무했고 일본에 서적이 조금 있는 정도였어요.


일본에 니시라는 교수가 있는데 니시요법이라고 야채즙, 녹즙, 붕어체조, 인삼요법, 버섯요법, 그 당시 내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강원도까지 가서 약초 캐고 하면서 효자 노릇 좀 했죠. 어쨌든 아버지께서 한 2년간을 무사히 건강히 계시다가 가셨죠그 기간에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부끄럽게도 내가 불교학자이면서도 아버지 죽음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런 기회에 말기 암환자에 대한 케어 실습을 내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고, 공부하는 데에도 전환점이 된 거 같아요. 학술적 공부가 내 임무라 생각했는데, ‘아 이 세상에 필요한 공부가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아버지 49재를 마치고는 바로 인도 행 비행기를 탔어요. 무작정 갠지스에 가서 죽음을 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각오가 필요했죠.


그렇게 돌아왔는데 능행스님이 청주에서 정토마을을 시작하셨더라고요그때 내가 갔을 때 비닐천막치고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겨울에 눈은 오고 추운데 40~50명이 비닐천막에 빽빽이 모여 있었죠. 그 열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곳에서 강의했던 기억이 나요. 인연의 시작은 뭐 그런 정도10년 전 불교대학에서의 인연이 스님은 호스피스 쪽 길을 걸었고, 나는 그런 쪽에 관심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다시 연결되었던 거죠.

 


활동과 학문이 딱 결합이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의 만남이요.


상당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렇게 열악한 환경인데, 모두의 정열은 정말 대단했거든.

 

 

그 인연이 대학원까지 어떻게 연결이 되었나요?


제가 97년도에 이곳 경주 위덕대학교를 오게 되었어요. 그때 스님이 언양에 건물하고 땅을 구입하신다고 한번 왔으면 좋겠다하셔서 간 적이 있어요. 가서 보니까 공장폐허에 불모지인데 위치가 참 좋았어요아 스님이 이제 가까이 오시는구나.’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리고 스님이 공부와 학업, 교육 쪽에 워낙 관심이 많으시니까 어느날 그 곳에서 마하보디상담대학을 시작하셨던 거예요. 그 대학을 하시면서 내게 연락이 왔는데, 이게 학위과정도 아니고, 전문가과정으로 운영을 하다 보니 학술적으로도 진척이 없고 학생들도 발심이 덜 하다고, 학위과정으로 어떻게 할 수 없겠나 하는 문의를 주셨죠.


당시 내 생각에는 학생들이 이론수업만 들어서는 안되고 적어도 하루쯤은 임상이라든가 실습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겸해서 그야말로 우수한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일을 추진해보려 하니까 조건이 안되는 거예요. 근데 스님과 연락을 하다보니까 스님 쪽에서는 그게 가능했던 거죠. 스님은 임상이 가능하고, 우리 대학원은 이론이 가능하니까, 그러면 합쳐보자 한 거예요. 그렇게만 한다면 이 분야의 최고의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다. 그렇게 스님도 나도 오케이 하고 2007년도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으로 승격을 하고 위덕대학교 불교대학원하고 MOU를 맺고 학위도 취득하고 임상과 실습도 겸하게 되었죠.


내가 볼 때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장이예요.

 


그렇게 저희 대학원에서 여러 학생들이 논문을 썼는데요, 그 중에 성과적인 논문이 있었나요?


불교 쪽에서는 참 쉽지 않은 논문을 많이 냈어요. 혁신적이라고 봐야지.


불교학에서 보면 불교학, 불교사, 지역불교 이렇게 연구하다가 응용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쪽이 있었는데 말이 응용이지 전문적이지 못했거든요. 대중적인 연구 정도밖에는 안되었는데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같은 경우에는 응용의 분야를 명상심리라고 하는 쪽에 한정을 시켰지만, 그쪽 분야에서는 정말 최초의 논문들이었죠. 임상까지 거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걸 다시 적용해서 임상적 효과를 입증하는 단계까지 간 논문이 그 당시에는 없었어요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이 아주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지요.


 

졸업생 분들도, 재학생 분들도, 또 입학을 고민하는 분들도 저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의 학문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글쎄,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축적이 되어야 하고, 네트워크 형성으로 활용도가 펼쳐져 나가는 거예요지금까지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네트워크 연결망이 부족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졸업생들은 개인적인 공부에 그치고는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계기가 열렸다고 봐요. 우리가 임상을 통해 논문도 쓸 수 있고, 현장에서 바로 케어에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런 계기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함께 고민해야 할 거예요.


능행스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성공한다면 전국 어디에 가도 성공할 수 있다고요. 적어도 이런 자재요양병원 쌍둥이가 50개는 되어야 한다고요.(웃음)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활동을 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해요. 분명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그냥 이렇게 사느라고 나 자신을 잘 못 돌아봤네. 이제부터 좀 돌아보려 해요. 조만간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 쪽으로 이 분야의 구체적 선진사례들과 학술적인 연구들을 살펴보고 싶고, 특히 그런 것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직접 다녀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 걸음을 통해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한번 더 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지금은 발목 잡힌 곳이 많아가지고 쉽게 움직여지질 않네요. (웃음)

 


교수님께서도 인생의 고비가 있으셨나요?


... 글쎄요. 저에게는 불교학을 만난 것이죠. 아마 이 길이 아니었으면 잘 먹고 잘 살았을 수도 있는데.(웃음)

어린 나이에 좀 더 쉬운 길도 있었는데 왜 힘든 이 길을 선택했을까? 그게 항상 고민이었어요. 이게 내 운명임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죠. 지금은 오히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 고비를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신 계기가 있으세요?


불교학 속에서 내 스스로가 이해되고, 인생에 대한 철학적 수용이 되고, 내 삶에 대한 문제가 풀어지니까요. 불교학 쪽에서 나를 송두리째 재발견하는 계기를 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글쎄, 나는 두 갈림길 중에 가고 싶은 길을 가지는 못 했지만, 그 길보다 훨씬 더 잘 온 것 같아요. 지나온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교수님의 인생에 있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불교학을 만난 것이죠. 그게 내 인생에서 제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죠.

 


앞으로 남기고 싶은 선물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별로 남길만한 그런 걸 갖고 있지 못한데...

 


교수님께서는 선물로 불교학을 받으셨는데, 선물을 안 주고 가신다구요?(웃음)


그런 선물이라면 뭐 좀 더 많은 사람이 불교학을 만나서 나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인데요. 교수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화두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다듬고 가꾸고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거죠. 마음은 그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해요이 마음을 잘 성찰하고 가꾸어 가야하고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저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대학원이 2년 반 과정이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그 시간 안에 좀 더 올인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너무 빨리 보려고 하지 말고, 이 길에 한번 매진해서 몰두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미래에는 분명히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생명교육전문가과정도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각자 깊이 있는 자기성찰, 그리고 학술과 실천 이런 부분에서 좀 더 적극성을 가지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은 불교가 아직 개척해 놓지 않은 길을 처음 가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길 없는 길을 가다보니 이 길을 잘 가고 있는지,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좀 흔들리기도 하고 힘들어 하기도 해요.


보물은 역시 숨어있는 거니까요. 보물은 찾는 대상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을 보면 보물 만나기 직전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죠.(웃음)


조금만 다른 안목으로 바라보면 길도 보이고 세상도 열리는데, 자꾸 자기의 좁은 안목으로만 세상을 보려 하니까 눈앞에 보물도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 자세도 중요하지만 자기 내면적인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예요그래서 스스로가 불교 생명과 윤리, 과연 이것이 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거기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해요그렇다면 분명 길도 보이고 적극성도 가지게 될 것이고, 멀지 않은 때 훌륭한 인물로 전문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학생들 각자가 자기만의 학문적 화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죠. 생명교육과정의 학생들에게도 부탁을 한다면, 불교 윤리는 상당히 다양해요. 그래서 어떤 가시적인 종교윤리가 아니고, 세속적 윤리도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지고지순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사회에서 활용될 수 있는 방안도 굉장히 넓다고 생각해요. 근데 현재까지 불교윤리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면 지나친 계율주의나 원칙주의에 빠져있어서 현대적인 해석을 못하고 있고, 그런 것이 오히려 본질적인 생명윤리에 접근을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제가 볼 때는 불교라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생명윤리에 있어서도 불교가 해야 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곧 그것은 불법에 대한 긍지인데, 그 긍지가 자기에 체득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한 명상심리와 생명윤리는 한 뿌리라고 생각해요. 자기를 돌아보는 명상이나 심리나 이것 또한 생명윤리와 접점이 있어요. 그리고 그 바탕에는 불교라고 하는 엄청난 세계가 있고요. 이걸 뿌리로 해서 다양한 전공도 앞으로 가능하고,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할 일이 정말 많아요.


학생들 스스로 불교적 철학 안에 내가 어떤 철학으로 생명윤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의 답을 얻어야 해요. 그러면 흔들리지 않죠.


불교생명윤리라고 하는 어느 부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철학적인 부분에서 정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사회적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주인의식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교수님께서는 불교 생명윤리에 대하여, 학생들에 관하여, 학교에 관하여, 애정이 담긴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교수님의 이야기들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웹진을 발행하는 오늘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애정어린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준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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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법휘스님을 만났습니다.

 

봄비 내려 촉촉한 월요일 오후, 마음 편집진들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딱 오늘 같은 봄날에 만나고 싶은 사람. 대학원 졸업생 법휘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법휘스님의 마음을 만나러 가는 길, 함께 동행 해 보실까요?

 

 

올해 3월에 졸업하시고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저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사실 지금 이 생활을 결정하기까지 많이 고민했고, 저에겐 많은 용기가 필요했거든요. 정말 많이 고민했고 두려웠지만 요즘에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지금 경험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망설이고 두려워하겠구나 싶거든요.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나의 느낌? 생각? 그런 내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고, 그것을 따라가는 시간이예요.

지금의 생활이 내가 걸어보지 않은 길이고, 익숙하지 않은 패턴이다 보니 많이 힘들었던 거거든요. 지금은 마음의 안정이 많이 되었지만, 이렇게 될 때까지 많이 갈등하고, 방황하고, 많이 두려웠어요. 내가 지금 잘하는 건가? 이렇게 해서 어떡하지? 시간이 갈수록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 생활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고, 선택하지 못할 거라는 그 마음이 저를 멈추어 세우더라고요차라리 무언가 하고 있을 때에는 불안은 없거든요. 뭔지 모르지만, 가면 되니까.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걱정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처음 어떤 곳을 갈 때에도 위축되지 않고 긴장되지 않게 되는 나의 모습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저는 늘 안전하고 확실한 것만을 찾아왔었고 결정해왔었거든요. 그것들은 안전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고민이 필요치 않았어요.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니까.

 

 

지금의 결정이 스님께 굉장히 치열한 결정이셨구나 싶어요.


저만 아는, 아무도 모르는 치열함이죠.(웃음)

저는 나 자신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정말 1%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느날 저에게서 엄청난 의존성을 본거예요. 그 의존성을 보는 순간 저의 모든 것이다 무너지는 거예요. 나의 모든 선택은 누군가의 손잡음이었던 거예요.


그 손을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잡고 가려고 하는지 그걸 보니까 내 삶이 너무 두려운 거예요. 늘 잡아주는 사람이 있고 끌어주는 길이 보였기 때문에 그게 없을 때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할 수 있을지를 몰랐는데 딱 놓고 보니까 너무 무섭고 막막한거예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혼자 내 길을 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난 영원히 이 손을 놓지 못하겠구나 싶더라고요.


근데 이게 정말 힘들더라구요. 미치도록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은 거예요나의 소리, 나와 친해지는 거, 내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 너무 힘든거예요.

 


지금은 그 소리가 들리세요?


이제 주위의 소리에 집착하지는 않게 된 것 같아요. 내가 뒤쳐진다는 느낌,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비교라든지 그런 부분에서는 많은 부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진 거 같아요.


참 아이러니 하게도 제가 만나는 환자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들이잖아요. 그분들이 제게 하는 공통된 이야기가 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요. 그러면 저는 이야기하잖아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 그것만으로 이미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체를 과연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죠.


열심히 하되 자기 안에 충만 되어있는 존재의 의미는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아요.

 


대학원에서의 여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 여정을 딱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도반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던 나의 큰 문제들을 풀어 낼 수 있는 시작점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했고, 그 과정은 어떤 결과물을 얻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내 앞으로의 삶을 위한 자양분? 토대를 닦는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라 하면 어떤 관계를 말씀하시는지요?


누구나 자신이 아는 자신의 모습이 있잖아요. 그리고 관계 속에서 함께 하면서의 또 다른 내 모습이 있구요.

우리는 많은 부분 그런 모습들을 잘 통합할 수 있고, 관계도 잘하면서 자신의 삶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나 혼자일 때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데 남들이 아는 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늘 너무 힘겹고, 어려움이 컸어요.


관계라고 하면 가깝게는 우리 은사스님일 수도 있고, 또 내 주변에 도반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일 수 있는데 그런 속에서 나의 온전하지 못한 부분들을 만나게 되니까요. 누구나 그 정도는 그렇잖아? 그럴 수 있잖아?” 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살아갈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런 부분들이 계속 궁금했고,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 좀 더 괜찮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찾고 있었거든요. 그런 마음들이 아마도 나를 정토마을로 오게 한 것 같아요.

 


그 기간이 3년이었어요. 3년이란 기간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데, 스님께서 짧게 말씀해 주신 그 여정이 굉장히 길게 느껴져요. 그 시간 안에서 스님의 그런 어려움들이 해결이 되셨나요?


...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다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무엇이 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늘 나를 과거 속에 가두는 내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것,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내 스스로 선을 긋고 과거 속에만 머물렀던 것이 나에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아요. 찾은 해결 방법이라고 한다면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면 된다는 것,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대학원과 함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 어떤 순간일까요?


사람들의 변화됨을 마주할 때인 것 같아요.

솔직히 자신의 변화는 잘 못 느끼잖아요.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가벼워지고 밝아지고 그런 모습들을 마주할 때 그때가 가장 기억되는 순간들이지 않았나 생각해요.

 


공부를 해 오신 그 시간 안에서도 어려운 고비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일과, 공부와, 공동체의 여러 가지 생활을 함께 했던 부분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체력적으로 너무 많이 힘들었거든요. 힘드니까 공부에 더 집중하지 못 한 부분도 있고, 그것이 계속 반복 되니까 내 스스로에게서 밀려오는 정체되어 있는 느낌들? 그런 것들이 가장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느 것도 완벽히 할 수 없는... 우리 공동체 스님들의 힘듦이네요.


그런 힘듦 속에서도 좋은 점이 분명히 있어요. 생활 속에서 공부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찾게 되니까요. 기도가 되었든 행사나 활동이 되었든 그런 곳에서 함께하며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자기 균형이 없다면 아무래도 소홀해지는 부분들이 생겨나고 그게 반복된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어지는 거죠.

 


공동체로 본다면 스님이 가신 자리에 또 누군가가 와서 그 일을 하게 될 텐데요. 누구일지 모르지만, 그 분들게 해주고 싶은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주위의 어떤 인정이나 기대보다는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는 것이 좀 더 오래 소진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스님께서는 영적돌봄가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그 여정이 궁금합니다.


이 영적돌봄의 일은 정말 정토마을이 저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이 일은 정토마을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에게 인연지어질 수 없던 일이고, 그곳에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뭔가 생각하고 움직였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그때에 시작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비록 정토마을과 떨어져서 나 혼자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 참 많은 공부가 되고, 앞으로도 이 길에서 얻게 될 삶의 배움? 인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가치에서 오는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준 일이죠.


아마 영적돌봄가로서의 활동이 있었기에 내 모습을 잘 성찰하고 용기 내어 지금의 어려움, 힘듦들을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스님은 영적돌봄가 법휘스님이라는 이름을 평생 가져가실 건가요?


여력이 닿는다면 늘 그 이름과 함께하고 싶어요.

 


지금은 영적돌봄가 스님들께서 각자 자기만의 몫을 하고 계신데 계속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스님이 지금 경험하는 것들을 나누어 주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이 일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함께 배워질 때 이 활동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적돌봄가 각자의 힘듦은 개인의 문제로 끝이 아니라 그걸 서로 나눌 때만이 같이 성장할 수 있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저는 경험했거든요. 함께해야 하고, 함께 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스님께서 앞으로 그리시는 모습이 있으신가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그 누구를 만나도, 관계 속에서 늘 편안하고 자유로운 그런 모습? 저는 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스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저에게 있어 마음은 [완성된 빈 도화지]이다. 그것 자체만으로, 어떤 식으로 그려지든, 어떤 모습이든 그것 자체로 온전하다.

그래서 저는 마음은 완성된 빈 도화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대학원에 오신 분들은 자신의 여정을 떠난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 여정에는 분명 좋은 일만 있지 않고 그것이 주는 아픔 또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일과 함께 힘든 일들도 올 텐데 그때 그 경험을 소중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떤 경험이든 다 소중하고 의미가 있고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분명히 중요한 부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이 올 때 피하지 말고 함께 머물기를.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네요.

 

인터뷰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너무 좋다고 말씀하시는 스님, 오늘 스님의 말씀 중에서 함께 해야 할 수 있다는 말씀이 굉장히 소중하게 들렸습니다.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힘든 여정을 지내오신 스님이지만, 지금의 스님은 어쩌면 더 커다란 공동체를 그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분주하게 움직이던 공부와, 활동들에 잠시 쉼표를 찍고 청소하고 밥하고 기도하는 살림을 살고 계신 스님의 오늘에서 정성스러움이 느껴져 저절로 듣는 마음 또한 따뜻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진심어린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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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상필 선님을 만났습니다.

 

봄볕 따사로운 2월의 어느 점심시간, 임상상담전문가과정 졸업을 앞두고 계신 대학원생 이상필 선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원과 이상필 선님의 만남은 딱 3년 전. 이상필 선생님은 졸업과 동시에 생명교육전문가과정에 재입학을 결정하시고,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데요, 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아주 많이 궁금해집니다. 3년만의 설레이는 만남에 함께 동행해 보실까요?^^

 


임상상담전문가 5학기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두고 계십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첫 입학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입학원서를 냈고, 면접을 봤죠.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저희 아버지가 그 당시에 돌아가셨는데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유골함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안방에 모셨는데, 어머니께서 그걸 너무 무서워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근처 절에 모시게 되었어요.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고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셨고 저도 슬픔이라기보다...뭐라 할까. 뭔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면접을 보면서 우리가족 상황에 대해 원장스님께 상담을 요청 드리기도 했던 것 같아요. 스님께 어머니에 대해서도 또 저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게 20142월쯤이었던 것 같아요.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이 참 궁금해요. 기억이 나시나요?


첫 마음? 글쎄... 특별한 마음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그 전에도 상담대학원을 다녔었거든요. 교육대학원에서 졸업을 하고 1년쯤 있다가 여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전부터 불교 공부를 좀 했었거든요. 그래서 저에겐 여기 대학원엔 상담과 불교 두 가지가 같이 있으니까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고, 저의 인간적인 개인사도 좀 해결하고 싶고 해서 입학을 했죠. 특별히 뭔가 계기가 있어서 했다고는 볼 수 없어요. 연속적인 공부처를 찾아서 온 게 여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었던 거죠.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공부를 하시면서 힘들었던 순간과 좋았던 점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저에게 힘들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힘듦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거 같거든요. 그래서 그 힘듦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그 힘듦을 조금씩이나마 개선해 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드니까 그런 면에서 좋았던 거죠약간 동전에 양면 같은 거예요.

 

 

3년 이란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활동들이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활동들이 어떠셨는지?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호스피스교육, 임상기도와 임종의식교육도 받았고요. 쉬어가던 학기에는 병원 위드팀 봉사도 했고...대학원에서 했던 특강은 다 했었네요. 열심히 했다기 보다 교육과정 안에 있는 것들을 했던 거죠.


저에겐 여기에 오는 게 힐링 같은 의미 였던 것 같아요. 직장에서는 힘이 드니까요. 입학하기 전에도 불교 공부를 했는데, 저는 신앙으로 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배우고 생활에서 실천해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싶어서 불법을 배웠고, 여기에 왔을 때에도 그에 연장선이었던 거거든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제 마음에 불편함이 참 많은데 그런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어서 제가 대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계속 하고 있는 거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온 때에는 편안한 거죠. 저에게 무언가 주어지지 않는 다면요(웃음), 저는 그런 게 싫거든요. 예를 들어서 총무를 하라던지 하는 것이요.(웃음) 일같이 느껴지니까요. 멍하니 앉아 있더라도 왔다 가면 마음이 편하고 좋더라구요. 여기서 약간 치유하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선생님 자체는 매우 성실하기 때문에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 성실함과 책임감이 너무 잘 보이니까 그런 일들이 또 맡겨지는 것 같아요. 학생회 총무의 역할을 하셨었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네요.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렸어요.(웃음)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시잖아요? 윤정숙, 이승훈 선생님도 수학 선생님 이시고요. 저희가 봤을 때... 세 분의 공통점은 너무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인데요, 어떻게 수학선생님 세 분이 명상심리라고 하는 이 과정을 선택하셨을까... 저희에게는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세 분 선생님께서는 비슷하게 느끼는 무언가가 있으신가요?


글쎄요...불법에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가 비슷하다면 비슷한 것이겠죠? 그리고 저도 수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수학의 원 뿌리는 철학이거든요. 세상을 보는 안목. 그런 면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과 좀 통하지 않나 저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측면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수학이 숫자를 계산하고는 있지만 그 근본 뿌리는 철학이니까요.

 


좀 이해가 가네요. 저희는 쉽게 수학은 이과, 철학은 인문학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수학을 철학으로 접근한다니 그럴 수 있겠네요.


그것 말고도 불법이 굉장히 과학적이잖아요. 수학도 어찌 보면 과학의 기초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 면으로 보면 좀 논리적이고, 분명하다고 할까요? 불교라는 종교가 뭔가 분명한 것 같아요. ‘아 맞다하고 금방 수긍할 수 있는 그런 게 있더라구요 수학도 그렇잖아요. 풀어보면 정확한 답이 나오니까.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고. 그런 믿음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졸업을 하시고 동시에 생명교육전문가과정에 다시 신입생으로 입학을 결정하셨는데요, 졸업을 앞두신 선배님의 마음과 또 다시 입학을 결정하신 선배님의 두 마음이 궁금합니다.


저는 그냥 계속적인 공부에 연장선이예요.


저에겐 호스피스활동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좀 있어요. 졸업을 하고도 활동을 위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좀 했거든요. 졸업이라는게 뭔가 끝난다는 의미잖아요? 아무 명목 없이 왔다갔다 활동이 될까? 그런 걱정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다행히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그래서 계속 이곳에 올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기게 되어서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있어요.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싶으신 마음이 있으시다니 굉장히 반갑게 들려요.


실제 환자를 만나서 봉사도 하고 싶고요, 능인스님 하시는 것처럼 어느 정도 임상으로 실력을 쌓고 나면 실전에서 강의 같은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 그런 꿈도 약간 있어요.(웃음)


 

그 꿈이 너무 반갑네요. 호스피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상사례잖아요. 죽음을 돌보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호스피스의 아주 핵심적인 역할일 텐데요. 앞으로 학교 안과 밖에서 배움과 임상을 통해 선생님께서 뭔가 하나의 꽃으로 피어났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활동을 부지런히 할 수 있다면, 실전에서 연습을 자꾸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좀 두렵기는 해요. 그렇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저에게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셨는데요,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하시면서 뭔가 계획을 가지고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너무 궁금했어요. 어쩌면 이게 너무 듣고 싶어서 이번 인터뷰에 선생님을 초대하게 되었는지 몰라요. 몹시 궁금합니다.(웃음)


저는 꼭 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작년에 이 휴직이라는 제도가 새롭게 생겨서 드디어 올해 제가 휴직을 하게 된 거죠.


뭘 하고 싶었냐 하면요, 하나는 출가를 하고 싶었고, 또 다른 하나는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백일출가를 신청을 해뒀고, 면접도 봤어요. 그래서 다음주 월요일에 당장 가야 하는데... 지금 귀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병원을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이 계획이... 출가를 3개월 하고 2~3개월 정도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할 거라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지금 뭔가가 다 얽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괜히 휴직을 냈다 싶죠. 이건 뭐 쉬지도 못 하고 아~ 정말 슬퍼요.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 하면 계속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가 이 순간 하고 있는 일에 집중을 잘 못 하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인데, 마침 여유가 좀 되니까 해보려고 한 건데 말이죠.(웃음)

 


얼마나 바랐던 휴가인데...그 슬픔이 충분히 공감이 되요. 천천히 살펴보면서 가라고 그런 것 같아요. 너무 몸을 혹사시키신 것도 있어요. 이 참에 내 몸도 좀 살펴보고 그렇게 천천히 가야겠어요.


그렇게 저도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 준비 없이 되지는 않는가보다 하고요.(웃음)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이 공부를 쭉 지속해서 이 배움을 현장에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제 계획은 54살이 되면 학교생활 20년차가 되거든요. 그때 딱 그만 두고 봉사를 할 거다. 그리고 실전이 좀 싸일 거잖아요? 그렇게 공부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강의도 할 수 있는 능력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좀 하죠.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요물이죠. 요물(웃음). 오늘 이랬던 마음이 내일 저렇고 내일 저렇다가 또 모레는 이렇게 변하는... 그 마음을 잘 다스린다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내 마음은 사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실제로 사람들 앞에 가면 마음이 거부하는 그런 거죠. 이 마음이 진짜인지 저 마음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고... 물론 그 순간에는 그 마음이 진짜이긴 하겠지만,


그 마음들을 내가 잘 수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사실은 이 공부의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부의 결과로서 이 요물을 잘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겠지요?(웃음)

 

 

끝을 맺고 그리고 또 다시 시작을 하는, 선배이면서 신입생이기도 하신데요, 또 다시 도반으로 만나게 될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마음 가는 데로, 그리고 중단하지 마시라는 것. 뭐 그러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을 만나는 것, 대화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힘들다 하시면서도 기꺼이 인터뷰를 허락해 주신 이상필 선,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라는 의식을 하여 힘들지만 응할 수 있었다 하신 선생님의 공부 이유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꿈의 끝자락 즈음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 함께 하고 싶다는 말에 그렇다고, 여기서 배웠으니 꿈에 포함되어 있다며, 같이 하자니 다행이라 하시는 선생님의 웃음이 아름다웠습니다.

함께 마주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기꺼이 내어 주신 이상필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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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도우스님을 만났습니다.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던 오후, 도우스님을 만났습니다. 카페에 앉아 논문을 쓰며 하루를 보내셨다는 도우스님, 졸업을 앞두고 계신 도우스님의 역사에는 어떤 숨은 이야기들이 있을까요? 마음가득 기대와 설렘이 차오릅니다. 함께 귀 기울여 볼까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입학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다 얘기 하려면 진짜 긴데? (웃음)


출가하기 전에 저는 9살 때부터 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찾았어요. 처음엔 그게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갔고, 이것저것 배워보고 해 봤는데 찾지를 못했어요. 다 아닌 거예요. 그런 시도를 계속 하다가 자포자기를 하게 돼요. ‘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내가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 이었나보다.’ 그렇게 되니까 우울증이 오더라구요. 근데 “너처럼 밝은 애가 왠 우울증? 니가 왜? 뭐가 부족해서?”라고 말하면서 나를 공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잘 살면 되잖아. 열심히 살면 되지” 그러는데 저는 “무엇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그게 중요했던 거거든요. 그렇게 우울감에 방황하던 시기에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알게 된 거죠. ‘아! 이거구나’하고요.


출가를 해도 스님들이 나가는 방향(진로)이 각각 다르잖아요? 저는 공동체를 하고 싶었어요. 공동체 운영 계획이 있었어요. 강원을 졸업하고 한 일 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알아보고 하면서 공동체를 준비하려고 했었죠. 근데 뭔가 복잡하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거예요. 


그런 복잡함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잠시 여기 정토마을에 봉사를 왔었죠. 제가 강원 4학년때 호스피스교육을 받았었거든요. 그때 이게 내가 찾던 길이 아닌가? 했어요. 그 인연으로 봉사까지 오게 되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저것 일을 하게 되고 원주소임까지 맡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CPE를 하게 되었는데, ‘아, 이건 정말 내가 찾던 거구나.’ 싶었어요. 내가 우울증을 겪을 때 누군가 공감해 준다면 더 바랄게 없었어요. 해결책을 바라는게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거든요. CPE를 하니까 들어주기도 하고 해결방안도 제시할 수 있는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도 입학하게 된 거죠. 정말 잘 시작 한 것 같아요. 또 특별히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과도 인연이 참 잘 닿았다고 생각해요. 서로 시너지 효과가 정말 컸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도 허물이 없어서 참 좋아요. 지금 생각나는데 첫 강의 들어갔을 때 ‘수업을 이렇게 해도 되나’ 했어요.(웃음) 너무 편안한 거예요. 숨통을 틔우게 하는 수업이었어요.

그 상태에 저는 소임살고 하면서 굉장히 팍팍했거든요? 대학원 수업이 저에겐 오히려 휴식처 같고 좋았어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음이 학생들을 만나 보니까, 정토마을 공동체 스님들의 대부분이 대학원 수업을 휴식처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하면서 공통점을 찾게 됩니다.(웃음)


그게 소임만 살다 보면 내가 여기 뭐 하러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학교에 가면 나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세울 수 있는 거예요. ‘그래, 내가 이걸 하려고 지금 일을 하고 있는거지?’ 하고요.

근데 일을 바쁘게 하다보면 자꾸 까먹어요.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는 거예요. 학교에 가면 ‘아, 그래 이거지!’ 하고 균형감을 맞출 수가 있는 거죠.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처음에는 공부를 하기에는 때가 늦었기 때문에 심리공부는 할 수 없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생각했거든요. 근데 할 수 있을까? 하는 설레임이 있었어요. 정말 원하던 것을 하게 되니까. 단기간으로 뭔가 배우는 것보다 울타리가 되어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내가 심리공부를 정말 정식으로 배우는구나 하는 안도감, 편안함, 성취감, 기쁨 이런 것들이 있었죠.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는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좀 놀라웠어요. 거의 포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이 부분이 저의 꿈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 온 것은 저에게 호흡과 같은 의미가 있어요.

 


졸업을 앞두신 스님의 마음은 어떠하신가요?


배운게 참 많다.(웃음)


어제 미술치료를 하는 바람에 사기가 꺽이기는 했지만, 굉장히 소중한 경험들을 한 것 같아요. 소중한 얻음을 얻은 거죠. 알아차림을요. 어제 미술치료를 하면서 마지막에 몰랐던 나에 대해 한 가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게 오늘 저를 많이 힘들게 했는데요, 마지막까지 본전을 챙기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리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어요. 알찬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는 실습이 바로바로 이루어 지잖아요. 그런 기회들도 너무 감사하고 그런게 되니까 학교공부도 튼실하게 잘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린이 명상이나, 환우들을 만나 프로그램을 할 때마다 부끄러운 거예요. 이런 단어들은 쓰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자꾸 쓰고 있고, 어쩌면 아주 당연한 것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가 있고 끝나고 나면 애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 줬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안타까움 부끄러움 그런게 많지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알차다고 느껴요.

 

 

 

배우고 익히고 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스님 앞에 펼쳐져 있었네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그래요. 내가 복이 많은 거 같아요. 소임 살면서는 내가 뭐 하는거야. 땜방 하는 느낌만 들고 티도 안 나고 지금 끝나고 나서 보니까 아귀가 딱딱 맞으면서 아 내가 진짜 복이 있었구나 싶어요. 나름의 피흘림이 있었어요.(웃음)


 

공부를 하시면서 힘들었던 순간과 좋았던 점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소임 살면서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던 거 같아요. 원주 살 때에는 앞치마 벗어놓고 뛰어올라가고 그랬거든요. 진짜 시간이 부족해서 숙제도 잘 못 해가고 그러면 교수님께도 죄송하고 동기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랬죠. 


제일 힘든 건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는 거지 ‘난 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난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하는,
그래도 교수님들께서 이런 것들을 따뜻하게 이해해주시고 인정해주고 지지해 주시는 모습에서 소임에 대한 귀함? ‘내가 귀한 일을 하고 있구나.’ 했어요. 교수님들과 동기들이 “힘들었죠? 잘했어요. 어땠어요.” 하면서 피드백을 해 주니까 다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많이 감사해요.


저 학생은 맨날 빠지고 왜저래? 하는 시선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올해 명상수업 지도법사로서 파랑지역 아동센터 아이들과 만나셨는데요. 소감을 듣고 싶어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워낙에 아이들을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예쁜 모습, 귀여운 모습만 좋아했던 것 같아요. 투정부리거나 울거나 하는 모습일 때는 귀찮아하고 안 보고 마는 제가 있었던 거예요.


 근데 명상수업을 하고 보니까 뭔가 책임감? 아이들의 컨디션이 좋거나 나쁘거나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게 이런 거 겠구나?’ 하는 느낌? 


아이들 웃는 얼굴이 정말 예쁜 거예요. 근데 저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보면 다 그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 분리심 같은 것들을 좀 알게 된 거 같고요. 아이들이 처음보다 지금은 마음이 많이 열려있다는 것에 안도감, 기쁨 같은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 반면에는 아이들이 열어준 마음만큼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하는 부담감이 함께 생기는 것 같아요.

 

 

 

내년이 기대가 돼요. 그리고 스님의 마지막 수업을 보면서 아이들이 발표하기 전에 생각하는 시간을 스님께서 따뜻하게 기다려 주시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면 좀 멍하고, 계면쩍을 수 있는 순간인데, 그 시간에 믿음이 간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하면서 느껴진 게 아이들이 대답 안 하고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할 말 없으면 패스해” 하고 정말 빠르게 진행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이 아이가 “할 얘기가 없으면 넘길까?”하고 제가 말하는 순간에 우물쭈물 얘기하려고 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얘기를 해버리니까 “없어요.” 하고 넘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기다려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시간인 것 같아요.

 


명상수업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요?


음... 아이들과 ‘쉼 명상’ 했던 거요. 사진에도 있는데 누워서 신체적 접촉을 하는 시간이었거든요. 저는 아이들이 장난치고 안 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너무너무 잘 하는 거예요. 서로 등에 손을 얹어주거나 할 때 참 조심스럽게 하는 모습들이 진정성 있게 느껴졌어요. 아이들에게 기본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어서 참 따뜻했어요.

 

 

이제 졸업도 하시고... 많은 것들이 마무리가 되어 가시는데요,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CPE슈퍼바이저가 되어서 영적돌봄을 하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우울증에 걸려 있을 때 나의 이야기를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영적돌봄이 필요했던 건거예요. 그렇게 사람들을 돌봄하고 싶어요.


지금은 일단 슈퍼바이저가 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이론적으로도 단단히 하고 싶어요. 이번에 논문을 쓰다보니까 제가 불교 쪽 이론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보강 해야겠다 생각해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스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창이예요.나의 영성과 신체, 물질과 영혼을 이어주고 바라보게 해 주는 문인 것 같아요. 

닫혀 있을 때는 분리되어서 알 수 없는 세계이지만, 창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 그게 마음 같아요.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저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자괴감에 빠질 때에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고 시간만 보내는 것 같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느 한 순간도 아무것도 아닌 건 없는 것 같아요. 다 그만큼의 자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자신에 대해서 정상적인 심리상태에서 평가를 해야지 자기의 심리상태가 바닥인 상태에서는 어떠한 결론도 옳은 결론이 아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하며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된 것 같다고 하시는 도우스님, 소중한 이야기로 함께 해 주신 도우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재능기부 : 교정 (이선영 - 부산 개금고등학교 국어교사)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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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졸업생 김정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시월의 어느 멋진 오후, 졸업생 김정옥 선님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선님은 왠지 더 따뜻했고 왠지 더 힘이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어떤 변화들이 있으셨는지, 함께 귀기울여 볼까요?


 

작년 3월에 졸업을 하시고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집에서 좀 쉬었어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근 10년 동안 집을 등한시 한 것 같고, 가족들에게도 좀 미안했어요. 그리고 어쨌거나 이루고자 한 것을 성취한 후였기 때문에 좀 쉬고 싶었고요.


또 졸업하고 한 1년을 저 나름으로는 많은 아픔이 있었어요. 작년 여름부터 이번 봄까지? 너무너무 힘이 들었어요. 엄마가 편찮으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너무나 가까이 있는 분들에게서 상처를 받으면서 좌절도 많이 했고,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숨어버렸어요. 완전 방콕했죠.

 


그런 아픔이 있으셨네요∙∙∙ 그 고비를 좀 넘기셨어요?


, 이제는 극복이 되었어요. 사실 이 인터뷰 한다는 것도 많이 주저되었지만 그 힘듦에 파묻혀서 언제까지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더 용기를 주었어요. 용기를 내려고요. 다시 당당히 마주서고 싶어요.


 

대학원에서 배움을 가지시면서 좋았던 점도 있으셨을 것이고, 또 힘들었던 부분들도 있으셨을 텐데요, 어떤 부분들이 있으셨나요?


좋았던 점이 많았지요. 우연찮게 호스피스교육을 받게 되면서 인연이 되었고, CPE공부를 하면서 대학원이 생겼고, 그렇게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었죠.


제게는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쉽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참 즐거웠어요. 정말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신이 났던 것 같아요. 동료들과 얘기도 나누고 다른 사람 공부하는 모습도 보면서 내 삶도 돌아보게 되었고 집에서도 더 당당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집의 식구들도 또 많은 지지를 해 주었고요, 편안하게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호스피스 교육을 몇 년도에 받으셨죠?


10년 된 것 같아요. 25기였어요.

 


그때부터 온전히 이곳에서 학업을 하셨다는 거네요? 보통 우리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년은 해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CPE도 상담이고, 10년의 시간동안 공부를 하신 건데, 님이 바로 전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단계를 아주 단단히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었던 점은 없으셨어요?


힘들었던 점은 주부로만 살다보니까 컴퓨터 작업이 늘 어려웠고, 발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했던 생각이 나요. 어려웠지만,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쯤 그 어려움을 극복해서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게 남아 있어요. 제가 회피를 많이 했거든요. 제가 잘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숨어버리는 성향이 있어요. 많이 죄송하기도 하고, 제게는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어요.

 

 

이번에 졸업하고 혜진원 직무연수 소진예방프로그램에 보조 강사로 함께 해 주셨는데요, 그때의 소감이 궁금했어요. 듣고 싶습니다.


사실 그 제안은 저에게 슬럼프에서 나오기 위한 첫 번째 큰 용기가 되었어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뭐든지 거절은 하지 말자! 무조건 오케이다.’ 하고 마음을 먹은 찰나에 대학원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그래서 거침없이 오케이 했는데 그 후에 고민은 많이 했지. ‘내가 또 왜 이랬노하면서∙∙∙(웃음)


혜진원에 갈 때 까지는 그냥 원장스님 뒤에서 보조만 맞추면 되겠지? 손이 필요할 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다행인 건 원래 일정이 있던 날 태풍 때문에 연기가 되어서 원장스님과 먼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그게 내게는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리고 얼마 전 부터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내 안에서 계속 용기를 만들었어요. ‘무조건 긍정마인드로 가자!’ 아픈 마음에서 나와야 하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 저에게 혜진원 직무연수는 첫 스타트였던 거죠. 참 보람 있었어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원장 스님께서 보조강사들은 앉아 있고, 학생들에게 선생님을 선택해서 가라고 했잖아요? 그때 진짜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걱정스럽고(웃음) 안 오면 어떡하지? 하고요(웃음) 근데 인원이 다 차는 순간에 그런 걱정은 다 없어지고 그냥 편안히 그 순간에 머물 수 있었어요.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뭘 그렇게 잘 하려고 애쓰고 고민했나싶은 마음도 올라오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죠. 자신감이 생겼죠불안,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 순간을 계기로 해서.


 

다음번에도 이런 자리가 있으면 함께 하겠노라 하셨잖아요? 그때는 이번처럼의 용기는 안 내도 되시겠네요?


그때는 이번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경험인 것 같아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혜진원 선생님들이 참 젊으신 선생님들이셨잖아요? 선배님께는 어쩌면 딸과 같은?


그랬어요. 혜진원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딸아이의 마음을 알게 된 부분들도 있었어요. ‘이 또래는 이런 고민들을 하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참 세상공부가 많이 된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남으셨나요?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은 이 젊은 선생님들이 그곳에서 24시간 엄마노릇 선생노릇 다 해야 하는데 너무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힘들면 안하고, 피하고 보는데 혜진원 선생님들을 보면서 참 뭐랄까. 겸손해 지더라고요. 저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안 보려 하고 배제시키고 피하며 살아왔거든요. 그런 저의 모습을 많이 반성한 시간이었어요.


또 우리 딸이 목표, 보람된 일들을 찾고 싶어 하는데 공부를 하면서도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게 뭔지, 많이 헤매더라고요. 근데 혜진원의 선생님들도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막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 눈물을 보면서 그 나이에는 충분히 그런 생각, 고민들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도 내 이야기와 딸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공감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들의 아픔과 또 저의 힘듦을 함께 나누었고 함께 공감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을 먼저 드러낸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하실 수 있었어요?


저는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은 어렵지 않아요. 편안하게 잘하는 것 같아요.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쉽고, 그렇게 사람들과 만날 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고 다가설 수 있는 것 같아요.

 


님께서 그렇게 편안히 자신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더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선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는 힘이 있으시잖아요? 훌륭한 상담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앞으로 그리고 계신 모습이 있으신가요?


뚜렷한 목표는 안 세웠지만,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어떻게든 사회에 환원할 계획입니다. 대학원 졸업할 때에도 공부했던 것을 나보다 아픈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동료들과 이야기했었고요.


그런데 제가 말을 잘 못하는 부분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거든요. 1년 반을 집에서 지내면서 고민을 하면서 누군가의 옆에 있음으로 편안한 마음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지고 아픈 분들, 나보다 못한 분들과 늘 함께하려고 원을 세웠어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출렁이는 바닷물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기쁘다가도 슬퍼지고, 좋기도 슬프기도 하고 하잖아요. 출렁이는 바다, 출렁이는 바닷물처럼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선님의 뒤를 이어 졸업을 하게 될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아요.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 뭘 이야기하노. (웃음)


저는 그랬어요. 뭔가 제대로 갖추어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이 참 컸어요. 그래서 늘 갖추어 있지 않았기에 할 수가 없었는데, 그런 것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 있는 그대로인 지금에서 최선을 다 하면 배우는 이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참 충만해 진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사실이 또 충만해졌고요. 후배님들께서도 그냥 있는 그대로에서 아낌없이 함께 나누는 삶을 산다면 참 보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 들어서 배움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누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왔지 싶거든요.

 

 

김정옥 선님을 만나며 마음가득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진심어린 이야기로 함께 해주신 김정옥 선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재능기부 : 교정 (이선영 - 부산 개금고등학교 국어교사)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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