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졸업생 현진 스님을 만났습니다.

 

올봄 석사 과정을 졸업하신 현진 스님을 만났습니다서둘러서 나선 길이었지만 현진 스님이 계신 대구까지는 2시간 남짓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3년이라는 시간동안 배움을 위해 쉽지 않은 이 길을 걸어오신 현진 스님의 마음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 첫 마음은 어떠셨나요?


진짜 오래됐는데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능행스님 책인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를 현대불교신문 광고를 보고 제가 구매를 했었어요. 그걸 읽는 순간에 , 이런 일을 하시는 분도 계셨나?’ 하고 너무 놀라웠어요. 왜냐하면 제가 포교나 자비를 베풀고 싶다, 봉사를 하고 싶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던 찰나에 그러한 행을 하고 계신 분이 있구나 싶었거든요. ‘이것이 실체일까?’,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포장된 것은 아닐까?’ 하면서 책을 읽어 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도 나고 그게 공감도 되면서 나도 이걸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걸 배워서 내가 우리 불자님들 또는 우리 신도들에게 베풀어줘도 되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위덕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호스피스교육을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거기에 마하보디라고 적힌 걸 보게 됐어요. 이거 저번에 책에서 봤던 거기네 하고 있는데 담당 교수님이신 장익 교수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스님께서 하시는데 프로그램도 상당히 좋고 교수님도 한 번씩 강의를 가신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호스피스 32기로 등록을 해서 그 때 교육을 받았어요. 정말로 속된 표현으로 한 방 맞았죠. 이런 체험이 있구나 하고요. 프로그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체로 가다보니깐 고스란히 저한테로 온 거죠. 그 뒤로 봉사도 가고 꽃동네에도 가서 몸으로 체험을 했어요.


그러다 대학 졸업을 할 시점이 왔고 위덕대에 대학원 신청을 했어요. 어느 날 능행스님께서 학교로 오셨는데 학교 성적 등을 보시더니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으로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금에 와서 늦게 불교 공부만 해가지고 내가 교수가 될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가고 베풀 수 있는 그런 쪽으로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스님께서 권해줄 때 이것이 인연이 아닌가 싶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일선에서 쓸 수 있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어서 결정을 하고는 마하보디와 인연이 맺게 된 거예요.


 

스님과의 인연이 32기 호스피스교육을 통해서인지 알았는데 신문광고를 통해서라는 것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스님께서 입학하셨을 때 활동과 접목하기 위해서 사실적인 것을 하기 위해서 대학원을 선택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어요?


처음에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깐 내가 가서 실존적인 것을 많이 배우겠구나 이런 기대가 많이 있었죠. 두려움, 막연함도 있었지만 성향이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새로운 분들을 알아간다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공부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교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던 부분을 마하보디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들이 있으세요?


낯선 분야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어요. 환자들을 만날 때 어색함이라든지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분들에 대한 저의 마음자세가 벌써 내 마음속에서 이미 그분들을 판단하고 있는 마음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낯섦과 두려움에 주저주저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 마음속에 또 다른 마음들이 많이 있구나를 느꼈죠.


그리고 모든 스케줄을 수업일정에 맞춰서 조율을 했는데 갑자기 하루나 이틀 전에 학과 일정이 변경된다거나 같은 과목의 수업이 연이어 있지 않고 격주제로 진행되면서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는 거예요. 외국인쉼터일도 해야 하고 운흥사 주지 소임도 해야 하고 학교도 가야하고 간간히 공연을 가거나 다른 절에 행사를 가거나 스리랑카 국제 행사를 가거나 하다보니깐 사실은 마음은 공부에 대한 열망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런 부분들이 해소가 안 되는 거예요. 공부라는 것이 되씹고 곱씹어야 내 것이 되는데 학교에서 열심히 하다가 막상 운전대를 잡고 2시간이 걸려 절에 돌아가면 현실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공부에 대한 목마름은 지금도 있어요. 뭘 배웠지, 지금 내게 남아있는 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주지 소임이라는 것을 다 벗어 놓고 앉아서 알아차림만 하고 공부만 하고 싶은데 왜 현실이 주지도 해야 하고, 먹고 사는 것도 생각해야 하고, 주변에 이것저것도 신경 써야 하고, 왜 이런 데에 매달려서 살아야 할까 정말 공부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운적도 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걸 이겨내는 것 또한 내 공부가 아니었나 싶어요.


 

마하보디 명상심리대학원에 오시는 스님들의 성향은 공부에 대한 기대감과 공부 양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 또한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학교인데 스님의 주변에 벌어지는 환경들로 인해 기대했던 것만큼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업을 계속 유지하는 게 굉장히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 어떤 순간이 있을까요?


1학기 때 한 방에서 비구니 스님들과 1박을 했을 때인데 능인스님, 상진스님과 한 방에서 학교 기숙사같이 도란도란 수다도 떨다가 몰래 나가서 야식도 먹고 한 것이 여고시절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초반에 그런 재미가 쏠쏠하게 있었어요. 공부 외적인 것으로는 체계가 1박을 하면서 머물렀던 것이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거기서 정도 쌓이고 돈독해지면서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더라고요


사람과의 관계가 어색하다보면 공부에도 집중되지 않는데 그런 부분이 충족되다보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학교라는 틀에 모여 있으니 내가 출가를 늦게 했든지 그 분이 빨리 했든지 이런 거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사실 그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호스피스 교육이 있었어요. 교육 때 이미 만났었고 그러한 끈이 연결되어 있어 편안할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저도 낯설어서 되게 어색했죠.


공부에는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도 중요해요. 탄호 스님 같은 경우에도 스님이 하면 나도 할게 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해보자 그렇게 했던 부분들이 그 분도 나를 잘 의지했고 나도 그 분을 의지했고 서로 부둥켜 안아보기도 하고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부분들을 마하보디에서 만들어 준 거 같아요, 다른 데서는 전혀 할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마음대로 남을 안아볼 수 있는 것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 이예요. 호스피스, 임상, MBSR, 미술치료를 거치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들도 정말 좋았어요. 박동길 선생님도 처음에는 너무 딱딱하고 경찰 같은 이미지가 강했는데 어느 순간에 미소가 번지면서 허물없이 스님 참 예쁘십니다.” 라고 농담도 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을 흘렸던 탄호 스님도 지금은 웃으면서 농담도 하고 얼굴빛 자체가 달라졌어요. 이게 교육의 힘이고 우리 멤버의 힘이라 생각해요.

 


인터뷰를 하면서 하나같이 말씀하시는 부분들이 관계를 말씀하세요.

공부 전에 관계다. 관계가 좋았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행정실에서 그 안에 투입되어 보지 못하는 내부적인 무언가 동기간에 끈끈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는 MT도 갔었고 졸업여행으로 스리랑카 10박이라는 기간의 추억도 있어요.

수업을 통해 나눔을 많이 가졌었는데 일대일로 서로의 아픔을 애기하면서 마음을 꺼내다 보니 아주 밀접한 관계가 되었어요.


처음 시작도 나이고 지금도 나인데 바라보는 마음이 변해 있었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변해있고, 그러다 보니깐 지금은 왠지 모르게 자매 같고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구 같아요.

 

 

앞으로 그리시는 모습이 있나요?


솔직히 저는 출가를 할 때는 정말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 같은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했고 내가 다 건지리라, 나라는 존재 자체는 없다, 오로지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삼구보리 하화중생하리라 하는 거창한 마음을 갖고 시작을 했었어요. 지금도 그런 마음은 늘 있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병행을 하다 보니 그런 마음이 퇴색되어 가는 게 안타깝고, 자꾸만 현실에 맞추려고 하는 내 마음이 있더라고요. 나도 적당히 살면 안 될까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보니 제가 센터를 열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너무 안일하게 사는 거예요. 절이 있다 보니깐 어느 정도 먹고 사는 게 충족이 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유지가 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 나태해 지는 거예요. 나태해지는 게 뭐냐 하면요, 공부라든지 특별히 무엇을 안 쫓아도 뭔가 삶이 해결이 되는 거예요. 나의 복일 수도 있지만 뭔가 목이 타면서 내가 이러려고 출가를 했나하고 머리를 만지게 되는 거예요. 아 이건 아닌데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십년은 복전이라든지 보시행이라든지 자비행을 해야겠다, 내가 복덕을 짓지 않으면 내가 다음에 정말 수행을 해서 한 단계 높게 올라가려고 해도 절대 올라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금전 다 모아서 외국인 쉼터(뿐다리까)를 만들었어요. 편안한 삶은 두고 지금은 매달 달세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에서 마음에 충만감이 오니깐 만족을 했는데 어느 날 그 부분도 내가 베풀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릇은 요만한데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가하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바라보면 내가 목표한 기간 동안 어떤 여파가 올 수도 있고 또 다른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내가 원을 세운 만큼은 해야 되겠구나 그러고 모든 걸 놓고 수행만을 하면서 말년은 그렇게 보내리라 이런 마음은 가지고 있어요. 계획했던 10년 중 3년이 흘렀고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공부도 하고 임상도 배우면서 내가 쓰일 수 있는 부분에서 쓰이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채우면서 살다가 알아차림을 제대로 하면서 지금의 수행자의 길과는 또 다른 수행자의 길로 나아가야겠다는 마음이에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 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저는 마음을 알아차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알아차림이 됐을 때는 마음도 다스림이 되지만 알아차려지지 못했을 때는 성난 파도와 같이 요동을 치게 됩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알아차리고 있을 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아차려지지 않았을 때는 마음이 아니라 습()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 생각해요.

 


대학원 후배들께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물론 잘 하고 계시겠지만 공부라는 것이 항상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기회가 왔을 때 공부에 한번 빠져봤으면 좋겠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공부를 하고 보니 공부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저에게는 남아 있어요.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공부에 도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학업 분위기와도 연결돼요. 도반과 좋은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면 지나고 봤을 때 그 시간들이 충만하고 따뜻한 시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 주신 현진 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재능기부 : 교정(이선영-부산 개금고등학교 국어교사)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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