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추상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구의 낮과 밤이 완벽하게 같아지고 우리 민족이 한해의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기준점이 되어온 춘분(春分). 태양의 중심이 적도에 이르러 지구의 바로 위를 직각으로 내리쬐기 때문에 지구의 중력도 고르게 분포된다는 특별한 그날에 우리는 대학원 졸업생 추상문 선생님을 만나러 울산 시내로 출발하였습니다. 지난 3월의 졸업식 때 감격의 석사모를 쓰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화창한 봄날의 도심지는 많은 차량들로 붐볐고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해 약속시간에 조금 늦어지고 말았지만 추상문 선생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자, 이제 추상문 선생님과의 데이트에 동행해 보실까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졸업 논문을 쓰시고 심사에 통과되어 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2016년도 봄에 논문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석사 5학기를 마치자마자 개인적인 사정으로 급히 미국에 가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이 논문을 쓰고 계신 것을 몰랐는데 이번에 논문을 쓰셨다고 하셔서 다들 놀랐어요. 재학 당시 선생님께서 준비하시던 논문 주제가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는데, 졸업생을 포함해서 다들 논문이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했을 것 같아요.
제가 정토마을에 근무하면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다녔잖아요. 당시에 제가 병원 식당일을 도와주면서 모든 환자들하고 친해졌는데 지도교수님이 저에게 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도록 논문지도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환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40문항으로 된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죠. 환자분 30명 정도 인터뷰를 했는데 제가 논문을 쓴다고 하니까 환자들이 협조를 참 잘해줬어요.
그런데 그 당시 미국에 있는 딸이 많이 아팠어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가서 살아야 하는가 싶어서 정토마을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떠나서 한 1년 정도 미국에 가서 간호도 해주고 아이들과 생활을 하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온 거죠. 한국에 다시 오게 된 이유는,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한국에 또 오고 싶은 거예요. 한국을 못 잊겠더라구요. 내가 살 곳은 한국이야.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이제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간다. 내가 이제 미국에 오기는 힘들 것 같다. 너희들 행복하게 잘 살아라." 하고 마지막 인사도 다 해주고 그러고 왔어요.
한국에 들어왔을 때 논문 쓸 생각은 안하고, 그 생각은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뭘 할까 하다가 제가 평소 컴퓨터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욕망이 많았는데 시간이 많으니까 컴퓨터를 배워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글2010부터 시작해서 파워포인트, 엑셀 이런 것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그러다 보니까 대학원을 마칠 때 못 쓴 논문이 생각났어요. 창피스러운 얘기지만 그 당시에 제가 컴퓨터를 못 만졌으니까 다시 논문을 쓸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 참에 내가 논문을 쓰자 해서 울산도서관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논문 쓰기 바로 직전에 대학원 다닐 때 지도교수였던 장익 교수님께 전화를 했어요. "교수님, 제가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그 당시에 장익 교수님이 위덕대학교 총장님이 되신 건 몰랐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총장 되었다는 얘기는 안하시고 "제가 바빠요. 그러니 제가 새로운 지도교수를 소개해 드릴게요." 하면서 권기현 교수님을 소개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권기현 교수님을 만났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고마웠어요. 거기에서 용기를 얻은 거죠. 그래서 울산도서관에 출근을 하면서 제가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근무할 당시에 환우들과 나누었던 설문지 조사한 것을 앉아서 차근차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도 하면서 논문을 쓰게 되었죠.
처음에는 참 힘들었어요. 야, 이거 참 막막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데 권기현 교수님이 참고할 만한 논문을 추천해 주시는 거예요. 이것을 한번 읽어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논문을 썼는지 보고 참고를 해라 하셨죠. 울산도서관에도 논문집이 있어요. 그래서 사서에게 부탁을 해서 제가 다른 논문집도 보고, 그렇게 논문을 쓰기 시작했죠. 중간쯤 쓰다가 권기현 교수님께 확인도 받구요. "제가 이런 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했더니 쭉 보더니 "됐습니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계속 쓰래요. "쓴 다음에 마무리를 하면,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저한테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작년 여름에 얼마나 더웠어요. 저희집에는 에어컨이 없어요. 방에 선풍기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더워서 안되겠더라구요. 그런데 울산도서관에 가면 냉방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시원해요. 새로 지은 도서관이고. 그래서 거기 다니면서 한 철을 보내면서 논문을 쓴 거죠. 작년 4월 말, 장익 교수님이 총장님이 되신 직후부터 제가 논문을 쓰기 시작해서 10월 말 마무리가 되었죠.
-논문을 쓰기 위해 굉장히 오랫동안 자료수집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2014년, 2015년, 2016년을 정토마을에서 근무했으니까 3년이 걸린 거죠. 논문 제목이 <말기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 연구>예요. 환자들이 살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을 인터뷰해서 쓴 거죠. 환자들이 협조를 안해 주셨다면 그런 논문을 쓸 수 없을 거예요. 그 논문을 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토마을에서 근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환자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논문을 쓰고 나서 권기현 교수님이 제 논문 쓴 것을 "오케이" 하는 순간 너무나 기뻤어요. "진짜 내 나이에 해냈네~" 하는 마음에 그날 저녁은 제대로 잠을 못 잘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요. 남들이 제 나이를 말하면 거의 믿지를 않으려고 해요. 제가 1944년에 태어났어요. 만으로 하면 일흔셋인가 넷인가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시죠? (웃음)
그러고 나서 미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어요. "아빠가 대학원 다녔던 거 알지? 그런데 아빠가 졸업 논문을 못 썼었어. 그런데 요즘에 논문을 완성했다" 하니까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손주들한테도 아빠 학위 받은 것을 알려주겠대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귀감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거예요. 큰딸이 고등학교 교사거든요. 나도 보람을 느꼈죠. 늦게 졸업을 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주 큰 거예요. 자부심이랄까, 마음에 정말 큰 용기가 됐고 삶의 큰 계기가 되었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고, 너무너무 좋아요. 후배들한테도, 후배들은 또 어떤 마음의 자세인지 몰라도, 이렇게 한번 성취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행인 것은, 그 당시에 제가 환자들과 나누었던 설문지를 폐기 안하고 가지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권기현 교수님도 설문지를 보시더니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이거 안 버리셨네요. 대단하시네요. 바로 이거예요, 이거." 하고 좋아하시더라구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정토마을에 오기 전에 제주도의 어느 절에 있었는데, 사실은 거기에서 대학원에 다니려고 했었어요. 전공은 사회복지를 하려고 했구요. 그래서 제주대학교 대학원에 원서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능행 스님과 연결이 되었어요. 스님께서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와보니까 그 안에 대학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 대학원을 여기에서 다녀야겠다 생각했죠. 저는 불자라는 자부심이 있고 불교에 참 많은 관심이 있었거든요. 전공과목이 좀 다르더라도 나 이거 한번 해보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능행 스님이 추천해 주셨죠. 사실, 정토마을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다니니까 참 편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은 두 딸! 나한테 진짜! 누구나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귀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죠? 미국에 있는 두 딸이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리고 이틀에 한번씩 저에게 전화가 와요. 거의 매일 전화하다시피 하죠. 전화로 대화하고. 작은딸도 그렇고 큰딸도 그렇고 너무너무 아빠를 좋아해요. 아빠가 엄마 없이 키워줬고 그랬는데, 아빠가 한국에 가서 산다는 걸 자기들은 마음 아파해요. 같이 살고 싶은데, 아빠가 왜 그러지? 우리 같이 살고 싶지 않아? 그런 물음을 던지면서 안타깝게 생각하죠.
제 나이 50살에, 그러니까 25년 전에 제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당시 저는 브라질에 살았어요. 두 딸이 있었는데 거기서 공부를 시켰죠. 제가 경제적으로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애들을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둘 다 미국에 유학 보내고 그랬어요. 당시에 미국에 영주권 없이 유학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두 아이를 공부시켰죠. 내가 애들한테 그래요. 항상 올바르게 살라고 하면서. 내가 중요한 것을 아이들에게 물려줬어요. 엄마 없이 자랐지만 내가 애들을 키우면서 한국말을 철저하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작은딸은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인데 한국말 다 하고 한글로 편지까지 써요. 한문은 잘 모르지만 한국말은 잘해요. 우리 작은딸 자랑을 하자면 5개 국어를 해요. 에스파이아어, 포르투칼어, 영어, 한국말은 기본이고, 프랑스어. 어디 가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보람 있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은 두 딸이에요.
-선생님께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무척 기뻐하시면서 자랑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기억나는데요. 그 동안 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셨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잘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가족을 두고 혼자서 한국에 들어오셨죠.
외국에 오래 살지 않으면 제 심정을 몰라요. 제가 브라질에 갈 때가 나이 서른 살 때였어요. 거의 40년이 넘었죠. 외국에서 몇십 년 오래 살다 보니까 한국이 너무 그리운 거예요. 나한테는 대한민국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어요. 내가 여기 와서 살려고 들어왔을 때 내 패스포트가 외국인 패스포트였어요. 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는데 김포공항에 딱 들어서니까 6개월 입국비자를 주는 거예요. 어, 6개월 있다가 나가라는 거네? 살지 못하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법무부장관한테 탄원서를 썼어요. 엊그제 집정리를 하다 보니까 그때 법무부 장관이 나한테 보낸 편지가 나오더라구요. 그걸 내가 간직하고 있었어요.
"장관님,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받았던 주민등록번호를 좀 살려주세요. 저는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하고 편지를 보냈더니 한달 만에 회신이 왔어요. 당신의 이력을 쭉 써서 보내 달래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학교는 어디를 졸업하고... 쭉 썼어요. 제가 브라질에서 기업체 운영한 것도 쓰고. 또 자랑은 아니지만 나한테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민주평화통일회의 브라질 지부 자문위원이었던 것도 썼죠. 그랬더니 6개월 비자 끝나기 한 달 전에 법무부장관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선생님이 사시는 동사무소로 가십시오. 가서 주민등록을 발급받으십시오." 그때 생각하면 진짜 눈물이 나요.
주민등록증 딱 받고 얼마나 좋은지, 정말... 그 기분은 정말 말도 못해. 그때 미국에 사는 친구한테 편지를 썼어요. 고등학교 동창인데, 만약 내가 죽을 때 네가 내 옆에 있다면 내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나랑 같이 태워줘라. 나는 화장하기를 원하니까, 같이 가고 싶어. 진짜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내 폰 컬러링 알죠? 그래서 내가 컬러링도 애국가로 넣은 거예요. 여기서 살려면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길래 핸드폰 사러갔는데 '컬러링은 뭘로 할까요?' 그러길래 "애국가로 해주세요" 했어요. 애국가도 1절, 2절, 3절, 4절이 있잖아요. "4절로 해주세요" 했어요. 4절이 나는 좋아.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난 이 컬러링은 절대 풀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저는 지금도 꿈이 있어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짧아요.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사용할까, 항상 그 생각을 해요. 아픈 사람들 있는 데 가서 봉사도 하고 싶구요. 그런 게 제 꿈이에요. 저는 인생을 좀 보람되게 살고 싶다, 어떻게 해야 보람되게 살까,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솔직한 얘기로 명절이 싫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고향에 간다, 친척을 만난다, 누구 만난다 그러고 가는데 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게 참, 마음이 그랬어요. 제가 사는 곳이 원룸인데 그곳에 어려운 사람이 몇몇 있어요. 요양원에 갔으면 참 좋겠는데, 이분이 요양원에 안 가려고 해요. 자식들은 이분을 그렇게 많이 도와주지를 못하고 있어요. 제가 도와주고 있죠. 제가 그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짧은 시간이지만 보람도 느껴요. 제가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런 보람된 일을 하고 싶고 여행도 다니면서 그러고 지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은 것이 많을 거 아니에요. 앞으로 살면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참회하면서 기도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런 얘기를 어느 날 어떤 스님께 얘기를, 내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했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참회도 하면서 이웃도 도와주면서 같이 삽시다. 그래서 지금 생각 중이에요.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참 막연한 질문이네요. 진짜 어려워요. 마음은 내 안의 진리이다.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나이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내가 선배가 될 거예요. 공부를 하다 보면 좀 막힐 때도 있겠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끝까지 해내야 되겠다는 마음자세, 그런 마음 자세를 갖게 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항상 가슴속에 논문 쓰지 못했다는 생각을 담아두고 있었어요. 이번에 논문을 쓰고 나니까, 언젠가는 꼭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명상심리를 배운 것은, 논문을 떠나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내 생활에, 내 마음자세에도 그렇고. 그런 것을 조화롭게 적용해 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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