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만남이 머문 자리에서는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권기현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새벽부터 촉촉한 봄비가 잔잔히 내리던 날 오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의 행정업무를 지원해 주고 계신 권기현 교수님을 만나러 위덕대학교 대학원을 방문하였습니다.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두고 임시휴일로 지정된 날이어서인지 아무도 없는 대학원 교정은 모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침묵이 안개처럼 스며 있었습니다.
권기현 교수님 방에 들어서자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책장 칸칸마다 하나 가득 진열되어 있는 수백 개의 소형불상들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 동안 외국을 다니면서 그 불상들을 하나하나 모으셨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바리스타를 자처하시면서 손수 커피를 뽑아주셨는데 신맛이 강하고 향이 부드러워서 우리가 준비해간 마카롱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교수님은 마카롱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의 일가견이 있으셨습니다. 자, 이제 권기현 교수님과의 데이트에 동행해 보실까요?
교수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평소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는 늘 같은 시간이 반복되기 때문에 불편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 대학원과 위덕대학교 불교대학원 협약에 따른 행정업무를 지원해주고 계시는데요. 그림자와 같은 조력자로 늘 함께 해주시는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교수님과 우리 대학원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인연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웃음)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의 관계는, 일단 원장이신 능행 스님하고 장익 총장님이 원래 옛날부터 아시는 분들이었고, 그때 불교대학원 원장이 장익 현 총장님이시고 제가 불교대학원 주임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던 거죠. 여러 가지 수업들은 장익 총장님이 주로 해오셨고, 우리 불교대학원 수업으로는 김경일 교수님이나 그 외의 다른 여러 교수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저 같은 경우에는 행정적인 업무로 뒤에서 지원하는 그런 입장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행사 때마다 어쩌다가 참석은 했지만 실제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만나서 뚜렷하게 서로 대화하고 홍보하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뭐랄까 그림자 같은 사람(?) 그림자는 아닌데... 조력자이기도 하고, 실제는 그것도 아닌데... 뭐 조력자라고 해야겠습니다. (웃음) 처음부터 제가 주임교수로 지금까지 해오고 있으니까요.
교수님,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 석사 수업 받을 때 교수님께서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도를 해주셨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기말 세미나 발표도 하고 그랬었죠?
네. 그렇지만 논문 발표라든지 세미나라든지 할 때 이렇게 보았지 직접적인 수업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서 실제 뭐랄까 얼굴만 알지 인간적이거나 아니면 학문적인 거나 하는 경우는 사실 적었죠. 몇 번은 행정적인 지도교수를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수업을 같이 하면서 학생들하고 만나고 해야 하는데, 교수와 학생들의 매개체라고 하는 것은 수업인데 수업이 같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어요. 앞으로는 수업을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생겨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좀더 저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고 학생들도 저뿐만 아니라 위덕대학교에 대해서 좀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네, 교수님 기대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산과 같은 고비를 만나게 되는데요. 교수님께서도 여러 고비가 있으셨겠죠? 교수님께서 삶 속에서 가장 큰 고비, 이런 것들이 있으셨나요?
큰 고비라고 하면 좀 그렇고, 작은 고비들은 좀 있었죠. 어려움. 고비들이라 하면 어려움들인데,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 교수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 교수 되기 전에 상당히 많은 어려움들을 겪는 부분들이 많죠. 저도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왔기 때문에 오자마자 상당히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었죠. 뭐 저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도 저와 같이 유학을 갔다 오고 대학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그 때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로 교수가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좀 많았죠. 교수를 포기하려던 생각까지도 했었고. 현실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었죠. 그 다음에는 강사 시절인데, 대부분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외에 인간적인 상황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큰 어려움들은 없었습니다.
교수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실 수 있었나요?
크게는 없었죠. 운이라고나 해야 될까요. 사실상 어떻게 보면 내적으로는 그때 포기를 했었습니다. 다른 쪽에다가 간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그때 마침 저쪽에서 제 자리를 만들고 있었죠. 제게 불교 일을 하는 것은 일정한 것이었고 그곳도 불교일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시점에서 학교에 자리가 나서 제가 위덕대학교에 머무르게 되었죠. 크게 힘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저의 큰 것은 불교 일을 계속적으로 하는 거고 다른 것을 했어도 비슷했을 거예요. 또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좀 뭐랄까, 대학 다닐 때부터 교수가 꿈이라고 할까 희망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마음속에 있고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사실 저는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연구원 정도만 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고 그때는 결혼도 하지 않아서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 이제 공부하는 거 괜찮다 했는데,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출가하는 걸 보니까 다들 괜찮게 사시더라고. 그래서 ‘아, 나도 저렇게 출가도 언제든지 가능하구나’ 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또 우연히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고 나면 또 출가를 할 수 없으니까 이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죠. 생활인으로서 살게 되면 현실적인 경제적인 거나 사회적인 거나 삶에서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힘들었죠. 그건 저뿐만 아니라 교수 된 사람들의 거의 70프로 이상이 아마 그런 과정들을 거의 다 겪고 있는 것으로 저는 압니다. (웃음) 제 주위에 있는 교수님들 거의 다가 그렇죠. 한 두서너 분 빼고는 제가 못 봤습니다. (웃음)
그 때 교수님이 안 되셨으면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법사 하려고 했어요. 교수 하려고 했는데 교수 되기가 어려우니까 법사라도 하려고.. 불교를 버릴 수는 없으니까 불교계의 법사가 되려고 했죠.
교수님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인가요?
제 딸들이죠. 제가 받은 선물을 말씀하시는 것 맞죠? (네) 딸이 둘입니다. 와이프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물이라고. 요즘에는 와이프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는 시대지만 실제 마음은 딸들인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잘한 일도 오히려 딸 두 명 키운 일인 것 같아요. 우리 불교는 무소유고 세간의 삶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쨌든 결혼을 했고 자식을 얻고 했어요. 단순한 자식과 부모의 관계보다도 제가 어떤 사람들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딸들이기 때문에, 제가 또 자식을 키우면서 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식을 통해서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느꼈던 그런 것들이 선물로 생각되죠. 만약에 제가 출가를 했다거나 결혼을 안 했으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의 부모님이 저를 키워주신 것에 대해서도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자식을 통해서 세상을 많이 알게 된 그것이 세상의 선물 중 하나겠죠. 그리고 불교 공부하는 데도 도움이 크게 됐고요.
교수님께서 세상에 남기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가요?
불교학자로서는 그렇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제 딸들이 불교 공부는 안하지만 불교적인 삶을 살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불교의 근본은 욕심을 덜 내는 거니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욕심을 자제하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수님이 그리는 앞으로의 모습은요?
제가 위덕대학교 교수로 있는 이상은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학생들을 위해서나 학교를 위해서나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사실 인도에서도 브라만 4주기라고 있는데 그 마지막은 세간을 떠나서, 산야시(Sanyasi)라고 해서 떠돌아다니는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돼 있어요. 지금 우리 불교 입장에서 보니까 브라만 4주기를 타종교의 삶의 방식처럼 생각하는데 실제 불교도 그런 삶에 근거돼 있어요, 마지막에는.
사실상 방금 딸 이야기나 생활 이야기도 했지만, 그게 또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한다는 그런 거. 가족들을 위해서 절제 아닌 절제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계속 길을 떠나는 것처럼 출가 아닌 출가의 그런 삶, 그렇게 해서 제가 세상이 좀 궁금한 것들에 관해서 방랑? 만행? 등의 삶을 살고 싶고요. 좀 더 넓은 세상, 바깥에서 제가 뭘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거죠. 제가 또 이때까지 학교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면 잘 못살 것 같아요. 그래서 외국에 가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서 어떤 공부를 하고 싶고요. 그건 또 건강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좀 이렇게 제가 아직도 모르는 불교, 늘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제가 그렇게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던 그런 분야에 관해서 혼자 어쨌든 해야 되는 길이므로 그런 것들을 좀 더 추구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죠.
마지막으로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도 경험하고 있지만 불교를 흔히 종교적인 의미로서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 자신의 수행적인 부분도 있고, 다른 여타한 부분들이 많은데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해야 하는 거죠. 부처님과 동격인 사람은 변할 게 없을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은 그 가르침을 받들어서 스스로 변화하고 그 변화를 남들에게 삶으로서 전달해 주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죠.
특히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상담이라거나 남들에게 그런 삶을 전이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더 내 삶의 변화, 지식적인 차원보다도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건 공부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또 대담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처럼,
다만, 본인이 먼저 어느 정도는 성숙되어야 하죠. 완전한 성숙이 아니더라도 내가 거기서 감동받고 변화를 느끼고 나서 남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하면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은 순수 학문적인 부분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그런 부분들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교수님, 우리 웹진 마음의 공식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우리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행동인 것 같아요. 마음을 마음으로 알기가 어려우니까 행동을 통해서 그 마음을 유추하는 거죠. 그 행동이 바르고 옳다고 하면 그 마음이 옳은 거고 행동이 옳지 못하면 그 마음이 잘못된 마음이 아닌가, 전도된 마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되네요.
교수님, 긴 시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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