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는 명상 여섯 번째]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대학을 다니는 보살님이 있었다.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었고 항상 꼿꼿하게 앉아서 열심히 듣고 기록하면서 공부를 하시는 분이다. 어느 날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다음 생에는 절대로 태어나고 싶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었다. 얼굴은 맑고 순진하게 보였지만 주름은 깊게 패여 있었다.
“왜. 태어나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되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대답을 했다.
“사는 것이 고달파서요. 신랑을 다시 만나기도 싫고, 그냥 안 태어나고 싶어요.” 괴롭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그렇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되는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겠다고 깊이 다짐을 하고 또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안 될까요?” 했다. 보살님이 겪어 온 삶을 알 수는 없지만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느낄 수가 있었다. 태어나지 않겠다고 기도하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고 태어나지 않을까? 그런 노력만으로는 아마도 윤회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크게 보면 하나의 씨앗이요, 나누어 보면 하나의 씨앗 속에 무수한 요인들 즉 작은 씨앗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범부의 안목으로는 씨앗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유식학은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무의식의 설명과 일치한다. 무의식이라는 것도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묘하고 광대하게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것 역시 무의식의 개념과 일치한다. 씨앗의 존재와 작용 그리고 성질은 자신이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근본 마음이며 찰나찰나 자신을 지배하는 마음이다. 내가 모르는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뭔가 찜찜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씨앗이 사라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기도한다고 씨앗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윤회를 끊겠다는 보살님의 바램은 옳다고 해도 그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씨앗은 스스로 움직이는 힘, 즉 본능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 안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은 씨앗은 죽지 않는다. 워낙 미세하고 고요하게 작용함으로 마치 없는 듯이, 죽은 듯이 보일 뿐이다.
해외 토픽에 실린 내용이다. 3천 년이 지난 무덤을 발굴하다가 무덤 안에서 그릇에 담긴 연꽃 씨앗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람의 호기심은 끝간 데를 모른다. 씨앗을 정성껏 다루어 심었더니 싹이 낫다고 한다. 3천 년이 흘렀지만 씨앗은 죽지 않았기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였더니 살아난 것이다. 업보나 인연은 그렇게 움직인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만나면 스스로 살아나게 된다. 노 보살님이 간절하게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씨앗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싹이 트고 생명은 이어지게 된다.
“보살님! 봄에 살아있는 씨앗을 땅에 묻었다고 합시다. 씨앗이 스스로 싹이 나길 원한다고 싹이 나고 원하지 않는다고 싹이 나지 않습니까?”하고 되물었더니 “비가 오고 따뜻하면 무조건 싹이 나지요.”하고 대답했다. 윤회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씨앗은 그 자신의 조건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윤회는 본인이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씨앗이 소멸되어야만 멈추게 된다.
마음의 씨앗을 소멸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 즉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에 걸리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대혜종고 선사께서 서장에서 밝히신 애응지물(礙膺之物)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달리 표현하면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라 해도 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해도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이다. 미해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고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일이다.
태어나지 않겠다는 간절한 염원은 또 다른 원을 만들고 강력한 정동적(情動的) 집착에너지를 축적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 이 생에서 만들어진 모든 인연들을 조용히 내려놓겠다는 태도가 윤회를 벗어나는 바른 길이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으면 된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을 때 비로소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며 걸림이 없으면 마음의 움직임도 멈추게 된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불교의 궁극은 그렇게도 설명된다.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노 보살님의 기도는 방향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고난과 시련을 안겨준 여러 인연들을 자비로서 용서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흔적없이 떠나보내는 것이 좋다. 그것이 진정한 힐링이자 중도이며 또한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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