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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9)

- 사람과 강아지 -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강아지라고 해서 모두 비슷한 성질을 지닌 것은 아니다. 아주 순해서 사람을 잘 따르는 시츄나 말티즈 같은 것도 있고, 양떼를 감시하는 데 적합한 콜리라는 강아지도 있고, 주인에게 유난히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진돗개도 있고, 사냥을 잘하는 세퍼드도 있다. 강아지라 하여도 타고나는 근본 성품에는 차이가 있다. 근본 성품은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타고나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사람이 타고나는 근본 성품을 본유종자(本有種子)라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경험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종자를 신훈종자(新勳種子)라고 한다. 훈련을 통해 강아지의 성품을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듯이 사람도 교육과 경험을 통해 근본 성품을 어느 정도는 바꿀 수가 있는데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을 신훈종자라고 한다.

 

강아지를 성품의 유형에 따라 구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능력이나 성품에 따라. 천재, 수재, 범재, 둔재, 등 지능지수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신중한 사람, 급한 사람, 명랑한 사람, 우울한 사람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심리검사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MBTI라는 성격 검사는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융은 사람의 성품(심리적 기능)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다. 태어날 때 이미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근기(根機)라는 말은 불교에서 수행이나 공부를 할 때 사람의 성품의 정도를 나타낼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고도 하는데 선수행이나 화두수행은 상근기의 사람에게 더욱 적합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성품의 정도에 따라 알맞은 공부가 있고 행동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 기독교의 그노시스 학파에는 사람의 그릇을 영적 단계, 정신적 단계, 육체적 단계 등 3단계로 구분하기도 했다.

을 믿는 자가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적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학파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주장에 밀려 지금은 역사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기반성과 자정 노력을 오히려 소홀하게 취급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근기(종류)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른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이 바로 그것이다. MBTI 검사의 16가지 성격유형은 좋다, 나쁘다라는 우열의 구분이 아니라 유형, 즉 종류의 구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유형에 대한 그노시스 학파의 3가지 구분과 유식학의 5가지 구분은 뚜렷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단계별 또는 성품의 수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첫 번째가 보살종성(菩薩種姓)이다. 최상의 근기로서 장차 보살이나 부처가 될 성품을 말한다. 물론 씨앗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수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보살에 이른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타인을 돕는 것이 즐겁숙한 사람들이다. 보살의 이타행이 몸에 익어서 자신의 이익보다도 타인을 돕는 일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둘째가 독각종성(獨覺種姓)이다.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차별성을 극복하고 무아에 이를 수 있는 사람, 아라한의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다.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수준, 알아차림이 가능한 수준의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가 성문종성(聲聞種姓)이다. 올바른 진리와 법을 배우고 들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성품이다. 혼자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배워야 가능한 사람들이다. 수준이 조금 낮지만 세상에는 배워도 안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면 이 단계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넷째가 부정종성(不定種姓)이다. 아직 성품이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이기에 노력하면 성문종성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노력하지 않고 염정심(번뇌의 마음)으로 살면 무성종성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한다. 좋은 스승, 좋은 도반을 만나면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없으면 불법의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사람들이다.

 

 

다섯째가 무성종성(無性種姓)이다. 불성을 갖추지 못한 성품이다.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범죄를 일삼고 남을 롭히는 것을 즐기는 일종의 반인격적 성격장애자들이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은 불법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교의에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는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무성종성의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유식학의 가르침과는 모순처럼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를 학문적으로 따져서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부질없는 헛수고일 뿐이다. 양자를 모두 수용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각각의 가르침의 근본을 받아들이면 된다.

 

 

개유불성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근본 종자 속에는 부처가 될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타고난 근본종자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생을 통해 닦고 또 닦아야 가능한 일이다. 두 가지 이론의 모순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살피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갈 노력을 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들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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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8)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 수행의 목표는 성불(成佛)이다.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불자들의 인사말 중에는 성불 하세요라는 말이 가장 흔하다. 또는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묶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도 한다.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증득이라고도 한다. 무아의 대한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불법에 바탕을 둔 해석이 있는가하면 주관적인 신비한 경험을 무아라고 하는 견해들도 있다. 무아의 대한 해석은 불교교리에 대한 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분별심이나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도 한다. 하나의 목표점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신치료 분야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소중하게 적용되고 있다. 정신건강이란 관점에서 불교의 목표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종교적의 본질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실존적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논의이다. 정신치료는 학문의 영역이고 또 과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신비한 색체는 일단 배제된다. 전생의 문제나 기도의 공덕, 또는 초월적인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임상적인 문제들과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내용을 다룬다.

 

간화선법의 체계를 마련한 대혜종고 선사께서는 서장에서 애응지물(礙膺之物), 즉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고 밝혔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적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불편함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으면 사는 것이 불편하다. 일상의 삶이 수시로 흔들리게 된다. 속된 말로 열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쉽게 열 받는 사람을 자유인 또는 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자유인이다. 애응지물에서 벗어난 사람을 도인이요, 성인이요, 부처라고 하는 것이 대혜선사의 가르침이다. 공자는 나이 칠십이 되어서는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 걸림이 없는 삶의 경지를 나타낸 말이다. 걸리는 것이 없다는 말은 올라오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경계(대상)를 만나면 마음이 움직이고 감정이 올라오게 마련이다. 원각경에는 그것을 증애심(憎愛心), 즉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라고 했다. 사랑과 미움은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감정이지만 호오(好惡)의 감정도 미추(美醜)의 감정도 항상 움직이게 된다. 경계를 만날 때 일어나는 감정을 참된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경험의 지배를 받는 중생들의 삶이다. 사람들은 애응지물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마음에 걸린 것들에 매달려서 불편하게 살아간다. 이미 조건화되어 있어서 걸린 것들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치료적 관점에서 볼 때의 불교의 목표는 걸림이 없는 사람, 올라오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광대무변한 불교의 진리를 모두 함축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일반인들의 실천적 수행방안으로서는 적확한 지적이다. “성불하세요라는 말보다 마음에 걸린 것들을 내려놓으세요라고 하는 말이 훨씬 살아있는 표현이다.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에 가깝다.

 

유식학에서는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아뢰야식이라고 이름 한다.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좋은 경험이나 나쁜 경험들을 모두 보관하는 창고를 말한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도 이곳에 모여 있다.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역동도 많은 차이가 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도 있고 약간의 불편만을 느끼는 것들도 있다. 애응지물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 때문에 걸린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명확하게 안다면 쉽게 벗어날 수가 있다.

 

애응지물을 자각하고 살펴서 벗어나는 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모든 명상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통찰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 경계를 멀리하고 대인관계를 정리하고 혼자 지내면서 자신을 살피는 작업은 안전하긴 하지만 통찰의 기회는 줄어든다. 소극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귀를 막아두고 고요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고요함이 아니다. 저자거리에서 중생들과 부대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참된 수행자이다.

 

아뢰야식을 살피는 작업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괜히 건드려서 과거의 아픔을 되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응지물은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정리해야 극복되는 감정이다. 물론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며 정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렇게들 살아간다. 그러나 참 된 자기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애응지물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이나 명상을 인생의 진검승부(眞劒勝負)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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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7)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의 수행법은 다양하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근기에 따라 자신에게 알맞은 수행의 길을 찾아서 가면 된다. 참선이 맞으면 참선을 하면 되고, 염불이 맞으면 염불수행을 하면 되고, 진언이 맞으면 진언수행을 하면 된다. 궁극의 도달점을 하나이다.

 

유식학에서는 수행단계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가 바로 그것이다.

자량위는 수행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흔히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노잣돈을 준비하는 과정에 비유된다. 멀고도 험난한 수도의 길을 떠나려면 필수적인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 이미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유식의 실성에 머물고자 하나, 아직은 능소이취(能所二取)의 번뇌가 단멸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능소이취란 능취()와 소치()의 두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와 대상에 대한 번뇌를 말한다.

 

자량위는 네 가지의 수승한 힘에 의지하는데, 인력(因力), 선우력(善友力), 작의력(作意力), 자량력(資糧力)이 그것이다. 인력은 훈습된 좋은 종자를 말하며, 선우력이란 좋은 도반이나 선지식을 만나는 인연을 말하고, 작의력이란 나쁜 일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않는 힘, 자량력이란 이미 쌓여진 복덕과 지혜의 힘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힘에 의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수행한다. 자량위에서는 화엄경의 수행 52단계 중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삼십 위를 닦는다.

 

두 번째는 가행위이다. 자량위가 여행에 필요한 노잣돈을 준비하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단계이다. 즉 수행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자량위에서 깨닫지 못한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게 된다. 여기서는 유식지관(唯識止觀)을 닦는 입문적 관법이다. 대상을 살피는 힘이 더욱 깊어지고 지혜의 힘으로서 나와 대상이 모두 공함을 깨닫고 아공과 법공을 거듭 인가하여 원만하게 성취하는 경지이다. 아직 세간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유류법 중에서 가장 수승하고 세간법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세제일위라 한다.

 

세 번째는 통달위이다. 통달위는 목표로 삼은 여행지에 일단 도착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통달위에서 소지장이 없어지고 아공과 법공에 의해 현현된 진여, 즉 진리의 본성을 요해한다는 뜻이다.

 

소지장은 대상에 대해 집착함으로 발생하는 장애로 객관적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이다. 이 위를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견도는 무루지를 발하고 진여를 증득하는 초입이니 십지(十地)의 초지에 해당하는 환희지이다. 십지는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해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이다. 화엄경의 수행 52단계 중 41위부터 50위까지에 해당한다. 견도위 이전은 범부 중생이고 견도 이후부터는 성자에 해당한다. 견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는데,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가 있다. 진견도는 본질적인 측면을 볼 수 있는 지혜로 만유공통의 근본체성을 보는 것이며, 상견도는 현상적인 측면을 보는 지혜로 대상의 차별성을 볼 수 있는 지혜이다. 통달위는 나와 대상에 대한 분별상을 버리고 무루지를 증득하는 자리가 된다.

 

네 번째가 수습위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근본적인 수행이 이루어진다. 수습위를 통해 번뇌를 끊고 단계적으로 진여를 증득하여 고유의 무명을 철저히 소탕해야만 비로소 본래 면목을 보게 된다.

 

수습위에서 증득하게 되는 무분별지는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출세간의 지혜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와 열반이라는 두 가지의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무분별지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야 얻을 수 있으며 이 지혜는 나와 대상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고, 묘한 운용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한다. 조중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가 거칠고도 무겁다는 뜻이다.

 

전의(轉依)는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버리고 보리와 열반의 종자를 얻으므로, 두 가지 조중을 버리고 두 가지 전의과를 증득함을 말한다.

 

수습위에서 비로소 진정한 수도의 과정에 입문하게 되는데, 6개의 근본번뇌 가운데 마지막인 악견번뇌가 사라진다. 악견은 워낙 견해가 강해서 악견이라 하는데 다섯 가지가 있으며 오리사(五利使)라고 한다.

 

오리사(五利使)의 첫째가 신견(身見)이다. 신체가 오온의 작용으로 이루진 것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아견(我見), 음식과 재물 같은 것은 고정불변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소견(我所見)을 합하여 신견이라 한다.

 

둘째, 변견(邊見)이다. ()과 유() 또는 단()과 상()의 극단적인 견해는 모두 양변에 치우치는 것이므로 중도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변견이라 한다.

 

셋째, 사견(邪見)이다. 잘못된 견해로 가장 중대한 것이 인과와 연기법을 믿지 않고 우연에 맡기고 방종하고 방만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믿지 않으므로 악을 고무하고 장려하게 된다.

 

넷째, 견취견(見取見)이다. 자신의 견해만을 취하고 고집하는 것으로 자기와 다른 견해들은 배척해 버린다.

 

다섯째,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자신이 지키는 계율만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마지막 단계가 구경위이다. 구경은 지극(至極)이라는 의미로, 수도하여 지극이면 성불이고 불위(佛位)이다. 번뇌가 없는 무루의 경계이며 법신이라 이름한다. 번뇌를 지닌 채 쌓은 지혜를 유루지라 하고 번뇌가 사라진 곳에서 얻은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구경위는 번뇌가 흘러내리지 않는 무루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고 지고지선한 선이며, 영원불멸이며, 고통이 없는 안락이며, 탐진치에 얽매이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경지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목적지이다. 이 단계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유식수행의 계위를 요약하면 수행자가 수행의 자산(자량)으로 삼아야 할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십위를 닦고 준비하는 자량위와, 네 가지 선근을 닦는 가행위와, 아공과 법공의 도리를 깨닫는 통달위와, 십지를 닦아 십성에 이르는 수습위와, 모든 의혹이 끊어지고 깨달음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진식득지에 이르게 되는 구경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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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6)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을 흔히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고 우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음이 무한하게 넓고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마대사는 마음이 법이요,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 마음을 떠나서는 삶과 인생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명상을 한다, 참선을 한다, 정신분석을 한다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불취외상(不取外相) 자심반조(自心返照)라고 가르쳤다. 바깥의 경계를 취하지 말고 자기의 마음을 밝히라는 것이다. 간화선을 꽃피운 송나라 때의 대혜 종고 선사는 애응지물(碍膺之物) 기제각(旣除覺)이라고 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신심명을 저술한 3조 승찬 대사는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同然明白)이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확연히명백하다.’고 했다. 마음의 문제를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개의 핵심감정 작용으로 정리를 해 버린 것이다. 원각경에도 중생의 고통은 증애심(憎愛心)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을 알면 아는 만큼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모르면 모르는 만큼 병리적인 삶을 살게 된다. 법구경 술천품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전쟁터에서 혼자서 천 명의 적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더 위대한 전사이다.” 자기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통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알아차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옛날 옛적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형제는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형님은 자신보다도 동생을 더 생각했고 동생도 자신보다 형님을 더 생각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 사람의 우애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나자 모처럼 두 사람은 멀리 나들이 길에 나서게 되었다. 산등성이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길가에 뭔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자연석 돌에 박힌 노다지 금덩어리가 분명했다. 형제는 서로의 눈을 의심하며 금덩어리를 살피고 또 살폈다. 가난하게 살아 온 고단한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그들은 가던 길을 재촉하며 한 나절을 더 걸어 강가에 도착했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배가 강 한 가운데쯤에 이르렀을 때, 형님은 갑자기 노다지 덩어리를 깊은 강물 속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풍덩소리와 함께 노다지는 깊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동생은 깜짝 놀라 형님을 쳐다보았다. 형님은 상기된 표정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후로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금덩어리를 줍고 나서 한나절을 걸어오는데 문득문득 만약에 네가 없다면 이 금덩어리를 나 혼자 가질 수가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 내 마음 속에 그런 나쁜 생각이 들어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우야,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다. 나를 용서해 다오. 이런 생각이 결국은 금덩어리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강물에 던져버렸다. 나에겐 금덩어리보다도 네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형님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금방 환하게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동생도 고개를 떨구며 형님께 말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형님은 부모님 이상으로 저를 아껴주시고 챙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걸어오는 동안 그런 나쁜 생각들이 문득문득 일어났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런 나쁜 생각이 들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형님이 미리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제 속이 후련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동생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나룻배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강물은 고요하게 흘러가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무심하게 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우애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평생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평소에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많은 요소(?)들이 숨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경계나 상황, 또는 환경에 부딪히게 되면 숨어있던 요소들이 움직이게 된다. 유식학에서는 그것을 종자라고 한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온 것을 본유종자라고 하고 출생 이후 만들어진 것을 신훈종이라고 한다. 탐심, 진심, 치심 같은 것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강한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정신장애를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종자들을 통찰하고 극복하는 것이 마음공부이고 심리치유이다. 종자들을 극복하게 되면 삶이 보다 편하고 자유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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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5)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중생들의 삶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다.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이익을 추구하는 삶은 항상 상대방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자신이 더 많은 이익을 가지려고 하면 타인은 그만큼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갈등과 다툼이라는 습에 깊게 물들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무료하게 느껴지는 황제라면 의도적으로 전쟁의 일으켜서 전쟁의 승리를 행복으로 여기게 된다. 승리자의 기쁨을 얻기 위해 적을 만들고 죄 없는 많은 생명들, 어린 아이들까지도 무참하게 해치기도 한다. 그러한 행동의 근원에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유식학은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우주 전체가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인식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삼성설(三性說)이 그것이다. 인간의 인식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중생의 단계와 보살의 단계, 그리고 그 중간의 단계를 나누어 설명한다.

삼성설은 사람들이 대상을 인식하는 세 가지의 방식을 설명한 것으로 첫째가 변계소집성(偏計所執性)이요, 둘째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며, 셋째가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에서 변계라 함은 주변계탁(周邊計度)의 뜻으로 일체의 모든 현상을 나와 대상으로 구분하고 계산하여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자아와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알고 집착하여 그릇된 상을 인식하게 된다. 허망한 인식을 통해 얻는 상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변계소집성이란 사물을 인식할 때에 범부의 미망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잘못 알아서 나타나는 일체의 사물 인식방식을 가리킨다. 이는 모든 대상을 분리하여 개별적인 존재로 봄으로써 상호관련성을 보지 못하며, 개별화된 것으로 인식하여 집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중생들의 보편적인 인식방식이다.

의타기성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름은 구름대로, 비는 비대로, 강은 강대로 각기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관련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 연기(緣起)를 의미하는데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일어난 것이므로 인연이 사라지면 현상도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모든 것은 한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의타기성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는 바탕이며 모든 인간관계도 상호 관련 속에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내 중심의 사고방식을 극복하여 전체의 관련성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고려하는 성숙된 사람들의 인식방식이라 할 수 있다.

원성실성은 둥근 원처럼 모든 현상을 하나의 유기체에게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본다. 마치 심장의 박동과 장기의 움직임, 그리고 손발의 놀림을 제각각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에서 일어나는 통일된 현상으로 보는 인식방식이다. 변계소집성이 낱낱의 현상을 독립된 것으로 보는 성질이라면, 의타기성은 낱낱의 독립된 현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며, 원성실성은 낱낱의 작용들은 결국은 하나의 유기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인식방식이다.

원성실성은 사물의 본질이 공임을 보는 것이고, 우주만상은 공에서 비롯된 다양한 현상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다는 근본적으로는 같은 모습이지만 바람이 불면 파도가 되어 일렁이고, 태풍이 몰아치면 집채만 한 해일을 일으키기도 한다. 파도가 높거나 낮거나 해일이 일거나 잠잠하거나 바다의 근원은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그러나 파도는 파도이고, 해일은 해일이며, 파도와 해일은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변계소집성에 의한 인식이다.

 

변계소집성은 낱낱에 집착하는 왜곡된 인식이다. 의타기성은 모든 현상은 상호 관련 하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관점은 타당한 것이지만, 아직 근본이 하나라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원성실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변계소집성의 관점에서 의타기성을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며, 왜곡과 혼란의 출발이다. 원성실성으로부터 의타기성을 보는 견해가 건강한 인식방식이며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주의 근원은 공이며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에 따라 인식하는 대상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은 내 마음의 모습이며 세상의 빛깔은 내 감정의 빛깔이 투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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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4)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은 파도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출렁인다. 잠을 잘 때도 마음은 움직인다. 무의식은 쉼없이 작용하고 활동한다. 꿈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쉼없는 자극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이 주어져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반응이 서로 다른 이유를 유식학에서는 오심설로 설명을 하는데 탁월한 심리학적 해석이다.

오심설은 의식(제육식)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설명하는데 순서대로 솔이심(率爾心), 심구심(尋求心), 결정심(決定心), 염정심(染淨心), 등류심(等流心) 등이다. 솔이심은 외부의 대상에 대해 처음으로 작용하는 순간의 마음이고, 심구심은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고 추구하는 마음이며, 결정심은 대상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하는 마음이다. 염정심은 대상을 결정한 후에 선심(善心)이나 악심(惡心) 등을 일으키는 것이고, 등류심은 잡염심과 청정심이 찰나찰나에 상속해서 같은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솔이심은 깜깜한 밤에 어떤 짐승을 만났다고 할 때 저기에 무엇이 있구나하는 마음이며, 심구심은 저것이 무엇일까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이며, 결정심은 호랑이다하고 결정하는 마음이고, 염정심은 무서운 짐승이구나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개입되는 마음이며, 등류심은 호랑이에 대한 평소의 무서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지속되고 이어지는 마음이다.

 

오심설은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식의 오류가 발생하는 과정도 알 수 있다. 눈이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안식이 사물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저기에 무엇이 있구나 하는 찰나적인 마음이다.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이나, 코에 어떤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모두 솔이심의 작용이다. 이 상태에서 더 이상의 마음을 내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인식도 진행되지 않고 멈추게 되며 인식 오류도 발생하지 않는다.

 

심구심은 솔이심이 인식한 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마음이다. 저게 무엇일까, 고양이일까, 아니면 귀신일까, 하고 대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순간적으로 들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알고 싶고, 코로 맡은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모두 심구심이다

 

결정심은 심구심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이라고 단정하고 결정하는 마음이다. 저것은 고양이다, 저것은 호랑이다, 또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일어난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하고 결정하는 마음이다. 저 소리는 하모니카 소리이며, 저 냄새는 참기름 냄새이며, 이 맛은 씀바귀의 맛이다 등이 모두 결정심이다. 결정심은 작동하고 나면 곧바로 염정심이 따라 붙는다.

 

염정심은 결정한 대상에 대해 선한 마음이나 악한 마음 또는 선도 악도 아닌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과거에 나쁜 감정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나쁜 감정이 일어나고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이 일어난다.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을 받는 마음이다. 고양이에게 할퀸 기억이 있는 사람은 고양이를 무섭게 인식할 것이며,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길렀던 사람은 매우 친근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염정심은 개개인의 경험의 지배를 받는 물든 마음으로 인식의 오류나 왜곡의 근원이며, 말라식이나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는다.

 

등류심은 계속 이어지고 흘러가는 마음으로 염정심에서 인식한 것이 잡염식이든 청정심이든 상속되고 유전되는 마음을 말한다. 고양이를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고양이를 무서워 할 것이고, 고양이를 귀엽게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귀엽게 보게 된다. 의식에서 인식한 것들이 말라식을 물들이고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부단히 이어지는 마음이 등류심이다.

 

오심설은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을 오해하는가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솔이심은 신체적인 이상 즉, 오감에 이상에 없으면 개인차는 크지 않다. 따라서 비슷한 정도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심구심에서부터는 차이가 생겨난다. 무엇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물체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구나 하면서 생각을 멈출 수도 있고, 지나 간 것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정심은 대상이나 현실을 파악한 후에 무엇이라고 결정하는 마음이다. 내담자의 경험과 주관적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내담자의 지적 능력과 경험의 세계가 동시에 반영된다. 이 단계에서는 개인차가 발생할 수 있고 주관적인 인식으로 인해 오해와 왜곡이 발생할 수도 있다. 결정심에서 일어나는 왜곡은 현실적인 판단의 미숙이나 지적 능력의 부족에 기인할 수도 있다.

 

염정심은 대상을 인식하고 결정한 다음에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이 개입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염정심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내담자의 주관적인 세계가 어떤 원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찾는 것이 염정심을 이해하는 것이며 무의식의 요소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염정심에 이르면 개인차는 더욱 크게 나타난다.

 

등류심은 이어지는 마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려면 내담자의 새로운 경험이 지속적으로 쌓여야 한다. 이는 무의식의 상태가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지속되는 것과 같다. 마음공부는 염정심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주관적이고 왜곡된 감정을 통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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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산책(3)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는 흔히 둥근 원 또는 구로 그린다. 그것은 마음이란 물건이 원만하고 둥글다는 의미보다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알 수 있는 얕은 표면의 마음이 있고 표면 아래로 들어가면 점점 더 깊은 마음 즉 자신이 알 수 없는 마음도 있다.

마음은 지구에 비유할 수 있다. 지구의 내부를 지표, 지각, 맨틀, 외핵, 내핵으로 구분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전 오식,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이다. 전 오식이 가장 얕은 수준의 마음이라면 아뢰야식은 지구의 내핵에 해당하는 가장 깊은 마음이다. ‘내 마음은 내가 안다.’라고 할 때의 마음은 대부분 마음의 표피 정도이다. 깊은 속마음은 보통사람(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정도에 따라 인격자 또는 성숙한 사람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다. 정신치료자 소암선생은 자신을 모르는 것을 정신장애로 설명하기도 했다. 수박껍데기를 보고 수박 속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속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타인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속마음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유식학에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무시이래로 즉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정보들이 보관되어 있는 마음이 창고이다. 보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아득히 먼 과거, 생명의 출현에서부터 사람으로 진화해 온 모든 과정의 정신적인 산물들과 개인의 모든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보관된 곳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비하면 콤플렉스,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자기 등이 통합된 개념이다. 마음에 보관된 정보들은 화석처럼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종자, 씨앗이라고 부른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종자를 본유종자라 하고 태어나서 새롭게 만들어진 종자를 신훈종자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이 놈의 종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바로 인간의 선천적인 기질이나 소인을 지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종자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종자도 있다. 가장 최신 심리학에 해당하는 긍정심리학에서도 행복의 조건으로서 태어날 때의 행복지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태어날 때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반드시 숙명적으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훈습에 의해서 종자는 변할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과 아뢰야식은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구성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은 감당하기 힘들어서 억압한 것들, 외면한 것들, 트라우마 등 주로 병리적인 것들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아뢰야식은 병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생산적인 것, 종교적인 것 등 훨씬 다양한 것들의 저장소이다.

 

아뢰야식은 되살아날 수 있는 종자의 보따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종자들을 품고 산다.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으로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장애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학교로 출퇴근하는 길옆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항상 시퍼런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저수지 안에는 물고기들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더니 저수지 물이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부터 바닥을 드러내더니 점점 깊은 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수지 바닥은 검은 색을 띤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상태로 열흘 정도 가뭄은 이어졌는데 무심하게 저수지 옆을 지나다니던 어느 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커먼 모습의 저수지 바닥에 잔디처럼 새싹들이 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가? 그 사이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은 아닐 것이다. 진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닥이 드러나고 햇빛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싹을 틔웠다. 보통 때는 짐작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씨앗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에도 자각할 수 없는 많은 씨앗(조건)들이 숨어 있다. 마치 암을 유발하는 DNA 인자가 잠복해 있다가 자라날 환경이 되면 암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뢰야식을 통찰하는 작업이다. 단번에 깊은 심연을 알 수는 없다. 가까운 것부터 순서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된다. 흔히 말하는 알아차림 명상은 가장 자각하기 쉬운 것부터 자신을 살피는 작업이다.

 

유식삼심송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유식 3)

 

불가지집수(不可知執受), 처요상여촉(處了常與觸), 작의수상사(作意受想思), 상응유사수(相應唯捨受), “아뢰야식은 그 작용을 알 수 없고, 집수와 처()와 요()의 작용도 알 수 없다. 항상 촉()과 작의와 수()와 상()과 사()로 더불어 상응하되, 오직 사수(捨受)로만 한다.”

 

아뢰야식은 작용이 미세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범부의 식견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꾸준히 마음공부를 이어가면 조금씩 아뢰야식의 종자들을 통찰하게 되고 마침내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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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산책(2)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유식학(唯識學)은 불교의 여러 사상들 가운데서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구사론을 8년 공부하고 유식학을 3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어려운 유식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식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번뇌와 경험에 물든 마음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지혜의 마음이란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청정심 즉 깨끗한 마음, 텅 빈 마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욕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이다. 그것이 왜 문제이고, 왜 잘못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유식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면 된다. 중생의 삶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심하게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낮선 사람에게서이 바보야!” 하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반응의 차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주관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무시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화를 더 많이 낼 것이고 무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보다 가볍게 대응할 수도 있다. 마음속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 있고 경험을 통해서 상처도 입게 된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에서 비롯된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 것이 청정심이다. 청정심은 착각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다. 물든 마음을 청정한 마음,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유식학의 목적이다.

 

정신분석학은 마음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지만 유식학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라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모두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구유식학파에서는 불성에 해당하는 아마라식(菴摩羅識)을 상정하여 구식(九識)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마라식은 식의 실성이며 진여성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범부의 정신 세계인 팔식만을 설명하고 있다. 범부의 정신세계인 팔식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전식득지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는데 전오식은 눈, , , ,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에서 발생하는 알아차림 즉 인식작용을 말한다. 전오식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작용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고 하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질, 소리, 냄새, , 감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이다. 감각기관이 인식활동을 할 때에 그 주체가 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 가지이며 근()이 인식하는 마음을 식이라고 하여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한다.

 

전오식은 다른 식들에 비해 인식활동이 단순하고 품성도 얕기 때문에 통칭하여 전오식이라 부르고, 이들이 대상을 인식할 때는 어떠한 사려분별도 요하지 않고 오직 눈앞에 있는 대상만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감각기관들 중에 한 가지라도 오염이 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분야만큼은 직감이나 추리, 억측으로 인하여 인식에 오류나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의식(육식)에 대한 설명이다. 의식은 전오식(, , , , )이 인식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판단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 등과 같은 감각은 의식이라는 마음을 만날 때 비로소 그 내용이 인식된다. 잠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고막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은 대상을 알아차림하는 작용을 하므로 요별능변식이라고 한다. 의식이 일어날 때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5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의식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독두의식을 예로 들면, 눈을 감고 혼자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독두의식도 독산(獨散)의식과 정중(定中)의식으로 구분한다. 독산의식은 홀로 떠도는 의식이고 정중의식은 선정 속의 의식을 말한다.

 


다음은 말라식이다. 말라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은 항상 살피고 득실을 계산하고 따지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본래 청정하고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말라식이다.

말라식은 어떻게 사량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 분별, 집취(執取)의 뜻으로 오직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만 하는 것으로 아탐(我貪), 아애(我愛)하는 분별사량의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말라식에는 번뇌의 뿌리가 숨어 있다. 의식으로 아무리 번뇌를 극복한다고 해도 말라식의 근본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번뇌에 휩싸일 수가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을 막고, ()에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고 생멸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치는 어리석음의 뜻으로 라는 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어리석음이다. 탐진치의 삼독을 일으켜서 해탈을 방해함으로써 아치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된다. 아견은 몸과 마음을 라고 여기고 여기에 집착하여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이다. 아집이라고도 한다. 일체만법에는 가 없으나 헛되이 에 집착함으로서 일어나는 번뇌이다.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무시함으로서 남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자신을 낮출 수 없으므로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아애는 번뇌에 물든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작용이다.

말라식은 사량하고 에 집착함으로서 항상 4번뇌의 바탕이 되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말라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악업을 짓게 되므로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 한다.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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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1)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 유식학은 중관학(中觀學)과 더불어 대승불교 사상의 두 기둥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관학은 흔히 공사상(空思想)이라 하여 불교신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공사상을 집약해서 나타낸 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며 그 중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공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의식에서는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그래서 공사상은 일반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불교인들에게조차도 잘 알려진 것이 아니다.

 

유식학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활용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이다. 보통사람(중생)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갈등과 대립그리고 투쟁은 피할 수가 없다. 자신과 타인, 자신과 세상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근원은 욕망이다. 욕망의 근원이 무엇이며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가르침이 유식사상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불교사상이며 또한 보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공사상은 진리 그 자체이다. 우주의 근본은 텅 빈, 공이다. 다만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현상들이 나타난 것으로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유식사상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통찰하게 하고 나아가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진리 자체를 배우고 이해하여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식과 이론은 배워서 타인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 안에서 진리를 구현하는 것은, 스스로 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유식(唯識)이란 오직 마음이란 뜻이다. 글자의 의미는 오직 안다는 뜻이지만 안다는 것의 심리적 의미는 인식이다. 인식은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의 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 인식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한다. 그것이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은 존재하기 어렵다. 달걀을 달걀이라고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달걀에 대한 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인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종자(성품)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현대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는 원자핵이다. 원자핵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전자나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나 중성자 등은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고정불변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작용 그리고 갈등과 대립 등도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된다. 주관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자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인식이다. 주관적인 인식의 근원은 마음이며 욕망이다. 마음을 알고,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면 갈등의 근원을 이해할 수가 있다. 유식사상은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하고 순간순간 요동치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열반(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하며 나아가 개인은 물론 사회, 국가 간의 갈등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는 사상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여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밤을 새우며 노력한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마음에 대한 공부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알아보았자 본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견(知見)만 늘어날 뿐이다. 오로지 본인 자신의 주관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타인의 수고를 슬쩍 차용한다 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마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야 비로소 올바른 과제가 되고, 넘어야 할 산을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살핌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아는 정도(의식성)에 따라 마음공부의 진전을 평가할 수도 있고, 정신장애의 심각성 정도를 구분할 수도 있다.


유식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가르침이며 나아가 진정한 자유인, 참된 도인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천천히 읽는 명상코너는 앞으로 유식학을 통한 자기 통찰과 자기 심리치유에 관한 내용을 연재할 계획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들은 이 코너가 끝날 때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이어가길 바란다. 나무 불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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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의 증득, 진정한 힐링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반야심경은 관음보살이 사리자에게 법을 설하는 독특한 형식의 경이다. 글자수는 비록 260자의 짧은 경이지만 반야부의 핵심경전이요 불교사상의 요체라고 볼 수 있다. 관음보살이 사리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은 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며 색은 물질을 뜻하고 수상행식은 정신의 작용을 망라해서 나타낸 말이다. 거기다 현장스님은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을 보태서 일체가 공임을 증득한 자에게는 그 어떤 고액도 없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야심경은 아마도 동아시아 불자들에게는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경이고 불교의식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고 독송되는 경이다. 과거에는 한자로만 독송되다가 요즘은 불자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된 경을 암송하고 있다. 오온이 공함을 관하고 모든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는 가르침은 수승한 진리요 궁극적인 도피안이다.


오온이 공임을 지식으로 이해하고 암송하지만 실제 그 진리를 통해서 일체의 고액을 건너가고 있는지 아니면 진리는 진리로 존재할 뿐 실제적인 삶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개개인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공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증득(證得)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현실의 생활 속에서 공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공을 증득했다 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오온의 공함을 설명하고 오온의 무상함을 파헤친다고 공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모르고 반야심경을 몰라도 공에 가깝게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근세의 대 도인이신 수월스님(1855-1928, 경허선사의 상좌)은 머슴살이를 하다가 스물아홉에 출가하여 관음을 찬탄하는 다라니경을 통해서 득도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되기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크고 유명했던 선방은 금강산 마하연의 동국제일선원이었는데 그곳은 이 땅에서 으뜸가는 참선도량이었다. 수월은 서른여덟의 나이에 마하연의 최고 어른인 조실스님으로 추대된 분이지만 평생 법상에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하며, 설법이라는 형태의 가르침을 펼친 적도 없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오로지 삶 속에서 공을 보여주신 분이다.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었고,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묵묵히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간 분이다. 당시 마하연에는 눈 밝은 수행자들이 많아서 스님의 진상을 알아보고 세속으로 치면 한 참 나이가 어린 수월을 조실로 받들어 모셨던 것이다.


중국 후한 시대에 승조라는 스님이 계셨다. 지혜가 출중하고 눈 밝은 것이 널리 알려져서 왕의 호감을 샀다. 왕은 그를 곁에 두고 국사를 논하면서 지혜를 빌리고 싶었다. 그래서 큰 벼슬을 내리고는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승조는 일찍이 대승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있었으므로 권력의 무상과 부질없음을 간파하고 있었으니 그 부름에 응할 수가 없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죽음 말고는 달리 받을 것이 없는 시대 상황이어서 승조스님은 서른한 살의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세속에서 보면 꽃다운 나이였지만 공의 세계에서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나이였다. 그가 남긴 임종게는 공의 실체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오온은 원래 공이다(本來空)

칼날이 내 머리를 내리치겠지만(將頭臨白刃) 흡사 봄바람을 베는 것 같다.(恰似斬春風)

 

승조스님은 공의 세계로 공답게 사라져갔다. 공을 증득함에 있어서 마지막 관문은 역시 생사의 문제, 즉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오온이 공함을 말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삶이 보다 공에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는 진리를 아는 사람과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의 삶은 달라야 한다. 만상이 공임을 체득한 사람의 삶은 허무와 허망이라는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보살의 길을 가게 된다.

 

불교의 진리는 모두가 마음을 정화하는 가르침이다. 참선을 오래하고 불교교학을 깊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은 그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공사상은 불교의 핵심사상이요 힐링에 이르는 근원적인 가르침이지만 오온이 공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언행의 불일치로 인해 마음의 병을 키울 수가 있다.


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부질없는 욕심부터 살펴야 한다. 물질적 욕심과 정신적 욕심이 모두가 공하다고 했으니 우선 정신적인 욕심부터 살피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괴물은 물질에 대한 욕심보다 심리적 욕심이 훨씬 더 다양하고 강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분노, 질투, 무시당했다는 생각, 그리고 과거의 억울했던 일들을 잊지 못하고 붙잡고 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비우는 것이 좋다. 그것이 공으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행동이 된다. 오온이 공함을 학문적으로 심오하게 이해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무엇인가를 비우고 내려놓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 공의 세계로 한 발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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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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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도 인정하기 나름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세상에 부족하지도 않고 결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신은 완전하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닐까 싶다. 만약 신이 완전하다면 그것을 행위로서 인류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적이 있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천재지변과 전쟁의 공포가 그친 적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길게 이어진 전쟁이 바로 종교전쟁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참수하지만 신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다. 기껏 전해오는 소리는 너희들이 죽으면 심판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라는 확인할 수 없는 메시지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존재이니 허물을 논할 수가 없다. 개는 개로 살고 소는 소로 살고 소나무는 소나무로 살아간다. 우열이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 자연의 법칙 안에서 평등한 생존을 이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에고와 의지로서 살아갈 뿐 아니라, 항상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생기게 마련이다. 관계 속에서 갈등을 잘 해소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수행자들도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수행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주로 혼자서 수행의 길을 간다. 무엇이 옳은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생물학적으로 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무리 속에 있으면 허물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를 쉽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들을 쉽게 하는 사람도 있고 매우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수가 있다. 어린 시절에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심하게 혼이 나거나 질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을 수 있고, 어릴 때에 잘못된 행동을 이해받고 용서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보다 쉽게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행동양식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에 심리적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파탄이 두려워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가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행동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건성으로 뉘우치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아강도가 약하거나 주체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잘 하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신의 존재감이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정상적이고 고마운 충고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끝까지 부정하거나 변명을 한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깊이 성찰하는 능력과 태도가 부족하다. 역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센 사람들이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잘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도 배려하고 타인도 배려하는 사람들이다. 무작정 타인을 따르지도 않고 완고하게 자신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잘못이 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고, 잘못이 없을 때는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간에 잘못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간단한 것 같아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동안 이미 쌓아온 습()이 있어서 그것을 금방 씻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가?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나무란다면 깊이 성찰하지도 않고 그들의 지적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처세술로는 좋을지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것이다.


맹자의 가르침에 이런 것이 있다. 타인이 자신을 욕하거나 비난하면 우선은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의 잘못을 찾을 수가 없다면 욕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다시 들어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타인의 문제를 붙잡고 그것을 해결해 주려고 내가 안달할 필요는 없다. 그냥 두면 된다. 참 좋은 가르침이다.

 


 허물과 과오가 없는 사람들은 없다. 부족하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사바세계의 삶이다. 누군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면 고쳐야 한다. 그래야 발전과 성장이 있다. 그러나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건성으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잘못이 있을 때 잘못했다 하고, 없을 때는 없다고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운명적인 한계는 도사리고 있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살피기 때문에 항상 왜곡과 착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에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항상 자기 입장에서 자기를 살피기 때문에 합리화라는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즉 자신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속성을 지닌 것이 바로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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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심리치유, 무의식과 종자론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 안에는 여러 가지 요소(또는 요인)들이 들어 있다. 사람들의 반응행동은 그가 가진 요소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동일한 자극이나 경계를 만나더라도 반응행동은 사람마다 다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또는 격분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응행동을 유발시키는 요인들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있다.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과론적(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불교 유식학의 관점에서는 종자론으로 설명한다. 후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무의식분석이다. 프로이트는 후천적인 무의식에 대해서는 주로 병리적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선천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은 선천적인 무의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후천적인 무의식의 개념을 개인무의식이라 하고 선천적인 무의식의 개념을 집단무의식(또는 보편무의식)이라고 이름 하였다.

현대심리학의 무의식의 개념은 유식학의 아뢰야식의 개념에 해당된다. 아뢰야식의 구성물 중에서 선천적인 것은 본유종자이고 후천적인 것은 신훈종자이다. 즉 출생 시에 가지고 오는 개개인의 심리적 요소들은 본유종자이고 태어나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종자는 신훈종자인 것이다. 종자(또는 씨앗)라는 용어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보다는 훨씬 더 생동적인 표현이다. 무의식은 글자의 의미로 보면 의식의 없는 상태이지만 종자는 생명을 지닌 씨앗으로서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살아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다. 심리적 요인들은 살아있는 것으로 감정 또는 정서에 해당된다. 죽은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역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기억일 뿐이다.

()이라는 것은 강력한 심리적 요소로서 살아있는 것이며, 서양심리학의 콤플렉스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이 둘은 모두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종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움직일 때는 예기치 못한 무서운 행동반응이 표출되기도 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것은 역린(逆鱗)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이나 콤플렉스는 생활 속의 걸림돌이고 장애물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완화시키는 것이 심리치유이고 자기통찰이며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무의식의 요소와 특성은 뒤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종자의 성질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종자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긴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않고 움직임도 없으므로 여간해서는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땅속 깊이 묻힌 씨앗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건이 맞고 환경이 주어지면 종자가 싹을 틔우듯이 심리적 요인으로서의 종자도 그것이 반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면 움직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종자로 인해 감정이 움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환경과 자극으로 인해 감정이 움직였다고 생각해서 환경이나 자극을 탓하게 된다. 즉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생각한다. 심리치유는 반응의 원인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종자는 찰나멸(刹那滅), 과구유(果俱有), 항수전(恒隋轉), 성결정(性決定), 대중연(待衆緣), 인자과(引自果) 여섯 가지의 성질을 구비하고 있어서 그 성질에 따라 움직인다.

찰나멸이란 순간순간(찰나)에 반응하고 순간순간에 소멸하면서 끝없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소멸한다는 의미는 종자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이 소멸한다는 뜻으로 종자 자체는 항구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염치없이 운전하는 사람을 보면 종자가 움직이지만 그 사람이 멀리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정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과구유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항상 연결되어 있어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곧바로 결과로 이어져 나타남을 말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착하고 아름다운 종자를 지닌 사람은 그 종자로 인해 착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하게 되고 반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자를 지닌 사람은 그 종자로 인해 악하고 게으른 행동을 하게 된다.

항수전은 종자가 찰나찰나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닭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든 닭만 보면 공포증이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결정은 종자의 성품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의미이다. 종자는 선한 종자, 악한 종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종자가 있다. 개개인의 종자의 성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고 운명적이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종자를 변화시키는 방법도 안내하고 있다.

대중연은 반응행동이 여러 가지 원인의 작용으로 인해 결과가 나타남을 의미한다. 종자의 성질에 따라 움직이지만 동일한 상황에서만 동일한 반응행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극에 따라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얌체 운전자의 운전행태에 과잉반응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질서를 무시하거나 염치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인자과는 각각의 종자는 각각의 결과를 끌어낸다는 의미이다. 종자의 성질에 따라 결과가 유발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종자의 성질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반응하게 된다.

이상으로 여섯 가지 종자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이는 본유종자와 신훈종자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종자를 통찰하고 그 특성을 알 수 있으면 자신의 행동특성이나 감정 반응양식을 알 수가 있고 나아가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스스로 치유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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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 또한 드물 것이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 하순이었다. 금년에는 가뭄도 유난히 심해서 나뭇잎을 만지면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으스러질 듯 했다. 친구랑 화장장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하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상주의 손에 들려져 나왔다. 올 때는 요란해도 갈 때는 조용했다. 영구차가 앞서고 친구랑 둘이서 그 뒤를 따랐다. 저승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배웅이다.

영구차는 고인이 자주 오르내렸던 동해안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가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더니 산촌 마을에 자리한 작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선다. 앞은 오십천의 지류이고 뒤는 팔각산 자락이 유순하게 펼쳐져 있다. 고인이 처음 교사 발령을 받아서 아동들을 가르친 곳이다. 20대 초반, 푸른 꿈을 안고 아이들과 마음껏 뛰놀던 초임학교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비록 한 줌 재로 남았지만 고인의 뜻에 따라 영구차는 이곳에 들린 것이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이다. 고향은 서로가 시골이었지만 그는 멋쟁이였다. 헤어스타일도 남달랐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겨울이면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었고 목도리도 항상 길게 늘어뜨려 멋을 부리곤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춤도 격식에 맞게 잘 추었고 축구 실력도 뛰어났다. 축구시합에서 공을 몰고 나가면 상대 선수 대여섯은 예사로 채치고 상대방 골대 앞에 이르곤 했다.

우리는 유난히 술을 좋아했는데 막걸리를 마시면 주머니 사정도 잊은 채 마셔대곤 했다. 한 번은 절친 셋이서 술을 마셨는데 주머니를 모두 털어도 술값이 모자랐다. 고인은 잽싸게 집에 달려가더니 탁상시계를 허리춤에 차고 나타났다. 그것을 잡혀둘 심산이었지만 주인은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입은 옷을 벗어 맡기고는 술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친구들이 어려움에 쳐하면 그는 항상 앞장서서 해결하려고 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절친 셋이서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무전여행에 가까웠다. 세 사람은 포항과 영덕 그리고 의성에 살고 있었으므로 모이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만 합의를 했는데 중간지점인 안동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과 대관령 그리고 오대산 등산이었다. 안동역에서 만나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영주를 거쳐 다시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경포대에 도착해서 야영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칫솔은 모두 가지고 왔는데 치약은 아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서로를 믿은 탓이라고나 할까. 하는 수 없이 여관에 투숙객처럼 슬며시 들어가서는 여관에 비치된 치약을 시용했고 해수욕장에서는 돈을 아끼느라 탈의실을 이용하지 않고 인파 속에서 적당히 둘러서서 수영복을 갈아입기도 했다. 대관령을 오르는 버스 안에서는 여자차장에게 애교(?)를 부려서 공짜로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런 일은 고인이 된 친구가 항상 앞장서서 처리하곤 했다.

월정사 계곡에서 야영을 할 때는 치약이 없어서 비누로 양치를 했는데 며칠 동안 입안에서 비누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가지고 온 약간의 돈은 모아서 저녁마다 막걸리를 마시는 일에 쓰곤 했다. 비를 맞으며 오대산 정상에 올랐던 날은 가지고 온 돈을 모두 털어서 막걸리를 마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가지고 온 반찬도, 차비할 돈도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오대산을 걸어 나오면서 민가에 들러서는 반찬을 얻고, 학교에 들러서는 처음 보는 선생님에게 차비를 구하기도 했는데 역시 고인이 된 친구가 나서서 해결했다. 남의 눈치보지 않고 용감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능력이 돋보였던 친구였다.

졸업여행을 갔을 때이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술판이 벌어지고 가무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평소에도 주먹을 쓰는 한 학생과 과대표 사이에 시비가 붙어서 싸움판으로 이어졌다. 둘은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잠그고 싸웠다. 싸움이라기보다는 과대표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상황이었는데 과대표의 비명 소리가 크게 흘러나왔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주먹을 쓰는 친구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고인이 된 친구가 맨주먹으로 이중 합판의 방문을 부수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싸움도 멈추게 되었다. 주먹을 쓰는 학생도 한풀이 꺾이고 말았다. 그는 의협심이 강했으며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도 강해서 남 먼저 교감으로 교장으로 승진을 하기도 했다. 육십 줄에 들어서 검도를 배우더니 단증을 획득하고 장구도 배우고 플루트도 배우고 바이올린에 오카리나까지 연주했다. 나이를 잊은 채 배우려고 했고 인생을 알차고 멋있게 꾸려가던 친구였다. 노후를 대비해서는 도심 근교 한적한 곳에 땅을 구해서 친구들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오두막도 짓고 아름다운 꿈을 가꾸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찾아온 병마는 정년퇴임을 달포 정도 앞둔 어느 날, 그를 그만 데려 가고 말았다. 아까운 친구였다.

영구차는 고인의 고향 마을을 지나쳐서 선산으로 접어들었다. 선친의 묘소 옆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날은 무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조그마한 구덩이 속으로 오동나무 상자 하나가 내려앉는다. 보드라운 흙이 덮이고 그 위로 작은 상석이 하나 놓인다. 흙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했다.

같이 간 친구와 함께 평소에 고인이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잔 가득히 붓고는 두 번 절을 올렸다. “나고 죽음이 모두 헛것이라 하여도 슬프기는 매 한 가지이다라던 춘원 이광수 선생의 산중일기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허망하고 슬펐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무심하게 남은 이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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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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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치, 정신장애의 원인

 

김경일 │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일치시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또 바라는 이익에 따라 사람들은 적당하게 말을 꾸미며 살아간다. 그것을 처세술이라 한다면 크게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불일치한 행동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행태이기도 하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표리부동이란 말도 있다. 같은 의미이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하는 시조 역시 행동이 불일치한 사람들을 나무라는 내용이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에는 선비정신이란 것이 있어서 언행일치가 사람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간신들이 우글거리는 정치판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 훌륭한 선비들이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되곤 했다.

불일치의 근본 원인은 우리의 정신이 통합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자신이 아는 정신인 의식이 있고 자신이 모르는 마음인 무의식이 있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식으로 아무리 다짐을 하고 각오를 해도 자신이 모르는 무의식이 움직이면 의식의 결정은 힘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도박을 안 하겠다고 각오하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지만 그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구에 비유하면 의식은 땅의 껍데기이고 무의식은 땅속을 의미한다. 땅 밑이 움직이면 땅 표면은 맥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드는 불일치를 좀 더 학문적으로 풀이했다. 인간의 성격은 무의식적 욕구가 중심을 이루는 이드(ID)와 개인의 이기성이 중심이 되는 에고(ego)와 도덕적 행위 또는 이타행이 중심이 되는 슈퍼에고(super 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셈인데 이들이 추구하는 욕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만약에 자식이 효자 소리도 듣고 싶고 재산 상속에서도 손해 보기가 싫다고 하면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두 가지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자 하니 불일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했다. 그것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무의식성을 통찰하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자신을 알아차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불일치한 삶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면 정신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다.

다중 성격장애(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정체감(특성)을 지닌 인격이 존재함을 말한다. 이런 경우는 하나의 통일된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 성격의 이중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질환을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자기 삶의 불일치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과 모르고 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도덕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정신장애는 아니지만 모르고 행동하는 것은 정신장애에 해당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일치한 행동을 하면서도 정신장애에 걸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겉과 속이 다름을 스스로 알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중성격장애로 진단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위빠사나 수행 또는 사티 수행 역시 알아차림이 근본이다. 내 안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그것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언행의 불일치를 알아차리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불교대학에 열심히 다니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색한 편이긴 하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에서는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물론 인정욕구와 이기성에 바탕을 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외관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 사람은 남들이 돈도 좀 쓰고 선행도 하라.’고 하면 나는 장사꾼입니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정직한 표현이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또 다른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돈 벌어서 뭐하느냐, 좋은 일 하라고 버는 거지.’ 라는 말을 곧장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는 장사꾼입니다.’ 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은 알 수는 없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불편함이 적고 잠도 잘 잔다. 특별히 잔꾀를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묘수들을 찾아야 하므로 사는 것이 좀 피곤할 수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잠들지 못하고 또 새벽에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계산이 복잡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불일치로 인한 갈등은 줄어든다. ‘사람 좋다라는 말도 듣고 싶고 이익도 챙기고자 한다면 머리를 많이 써야한다.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도 불일치 현상이다. 하나로 통합해서 살아야 편하다. 이래야 좋은 건지 저래야 좋은 건지를 두고 밤잠을 설치며 생각을 이어간다면 힘 들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자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는 편안하고 남들에게는 믿음을 준다. 하나의 자기를 온전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그렇게 노력해 가는 것이 성장이고 성숙이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카를 융은 자신에 대한 무의식성, 즉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을 정신장애라고 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의미한다. 즉 내면의 자기를 통찰한다고 해도 되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업을 알아차리고 극복하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은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목적이 될 것이다. 즉 하나 된 자기, 일치된 자기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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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외면당한 또 하나의 나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콤플렉스는 불편한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평온하게 유지되다가도 콤플렉스가 자극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감정이 요동을 쳐서 당황하거나 허둥되면서 평상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콤플렉스는 자신 안에 고요히 숨어서 지내는 감정의 덩어리다. 죽은 듯이 있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일어나서 반응을 보이는 존재이다. 마치 아직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소.” 하고 소리치는 존재이다. 콤플렉스는 내 안에 살지만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이단아, 반항아 같은 존재이다. 불편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엾은 존재이기도 하다. ‘외면당한 또 하나의 나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는 해결되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이기도 하고, 억울하고 무시당해서 생긴 풀리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기도 하다. 또한 남에게 자랑스럽게 내 놓을 수 없어서 숨기고 싶은 열등감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콤플렉스는 존재한다. 다만 힘(에너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강력한 것을 지닌 사람도 있고 소소한 것을 지닌 사람도 있다. 에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콤플렉스는 위험한 것이다. 마치 신체의 암과 같은 존재이다.

강의를 하는 중에 어떤 중년의 부인이 주위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오더니 불쑥 내가 바보여서 그렇습니다.”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제 자리에 가서 앉는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금방 하던 강의 내용을 잠시 돌이켜보니 남편의 외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부인은 배우자의 외도에 관한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 아닌가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콤플렉스는 의식의 흐름을 멈추게도 한다. 의식을 회복하게 되면 대개 깊은 후회를 하게 된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이처럼 콤플렉스는 불편한 존재이다.

불교상담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보살님 한 분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잠시 울먹인다. 함께한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약간 놀라는 시선을 보낸다.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는다. 5살 무렵에 본인이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단다. 어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인근 고을에 한의사가 있긴 한데 집에서 진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5일장을 따라다니며 장바닥에서 침도 놓고 뜸도 뜨고 약 처방도 해주는 그런 의사였다. 어머니는 그 한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그가 가는 5일장을 모조리 따라다녔다고 한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소달구지에 딸아이를 태워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소아마비에 좋다는 밤을 사다가는 삶아서 한 그릇씩 딸아이에게 먹이기도 했다. 5살짜리 어린소녀는 소달구지에 실려 5일장을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과 지극한 정성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누가 어머니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어린 시절, 그 감정이 봇물처럼 밀려올라와 주체하지를 못한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덩어리이고 그것이 콤플렉스의 일종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가슴에 응어리져서 풀리지 않는 것으로 삶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이다. 자유로워지려면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다. 고마운 마음만 가슴에 남기고 지난 날의 감정에서는 벗어나는 것이 콤플렉스의 극복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머도 뛰어나고 술도 잘 마시고 대인관계도 원만한데 유독 가창에 대해서는 강력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2차로 노래방에 갈 일이 있으면 언제나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같이 간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남들은노래를 잘 못하면 어때, 하는 대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사자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노래를 잘못 불러 심하게 창피를 당했다거나, 어릴 때 아주 불쾌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콤플렉스는 타인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깐 일로 뭘 그래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체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들도 있다. 어떤 부인은 초등학교 시절에 팔에 골절상을 입고는 수술을 했는데 전문의가 없는 시골에서 한 탓에 완치가 되어서도 팔이 약간 안쪽으로 휘어버렸다. 친구들에게 더러 놀림을 당하고는 팔을 내 놓고 다니지를 못했다. 한 여름에도 항상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해서는 긴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6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부인은 항상 긴팔의 옷만 입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춘기의 학생들은 더욱 심하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입시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성형외과 수술 예약은 넘쳐난다. 쌍꺼풀 수술은 기본이고 코를 높이고 턱을 다듬기도 하고 얼굴 곳곳을 성형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가장 좋긴하지만 그것이 힘들면 오히려 성형을 해서라도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콤플렉스가 누적되고 심해지면 심리적 증상은 다른 곳으로 옮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인기피증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잘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극복해서 보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 콤플렉스에 짓눌려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콤플렉스의 극복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억울했던 감정도 피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받아들여야 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감정도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그때 그랬지, 참 힘들었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래를 못하는 것도 피하지 말고, ‘나는 원래 노래를 못해 못하면 못하는 대로 부르지 뭐. 그것 때문에 욕을 하겠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두려움도 줄어들게 된다. 콤플렉스는 받아들이면 성장의 발판이 되고 숨기면 심리적 장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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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필요한 가면, 페르조나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길어진 수명에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절박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인 여건이 되면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귀농을 적극적으로 권하며 지원방안들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고 귀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매우 필요한 노력들이다.


귀농이나 귀촌에는 물질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성찰과 노력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흔히들 시골 사람들의 텃세가 만만하지 않다는 말들을 하기도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베풀어야 이웃과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 행복하려면 보다 근원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핵심은 시골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에서 쓰던 가면은 벗어던지고 시골생활에 맞는 가면을 써야 시골의 삶에 적응할 수가 있다.

 

카를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심리학자요 정신과 의사이다. 서양의 심리학자이면서도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하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깊어서 티벳 불교의 구도자 파드마 삼바바가 저술한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학자들 중에 카를 융을 따를만한 사람이 아직은 없어 보인다. 불교심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식학과 닮은 점이 많아서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한 논문도 여러 편이 있다.


융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 중에는 페르조나라는 것이 있다. 하회탈처럼 가면이란 뜻이다. 하회탈에는 양반탈, 각시탈, 백정탈, 초랭이탈 등이 있다. 양반탈을 쓰면 비록 하인이라 할지라도 양반처럼 여유가 있고 늠름하게 행동해야 하며, 각시탈을 쓰면 수줍어하고 차분하게 행동해야 하고, 초랭이탈을 쓰면 경망스럽고 방정맞게 행동해야 한다. 가면()의 성격(정체성)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얼른 생각하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해서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사람은 누구나 지위와 환경에 맞는 탈을 쓰고 산다. 그것이 타인과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페르조나는 타인을 속이기 위한 나쁜 의미의 가면이 아니라 신분과 체면을 지키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가면이다.


우리는 많은 가면들을 수시로 바꿔 쓰면서 살아간다. 하나의 가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회사원, 사장, 자식, 남편, 학교동창, 종교인, 향우회원, 군대친구, 술친구, 욕친구 등등이 있다. 자식들 앞에서는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사랑과 권위를 지키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자식의 가면을 쓰고 나이도 잊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애교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도 회사에 가면 사장으로서 위엄과 엄격 그리고 가혹한 모습도 보여야 한다. ‘욕 친구를 만나면 모든 가면을 또 벗어던지고 소시적 욕하던 친구의 가면을 얼른 뒤집어 써야한다. 만약에 욕 친구 앞에서도 사장의 페르조나를 쓰고 거들먹거리거나 폼을 잡는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초등학교 시절의 순진하고 철없던 페르조나를 쓴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가면을 너무 오랫동안 쓴다면 벗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이 권위적인 가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법조인이나 경찰, 높은 지위의 군인으로 오래 생활했거나 정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가면을 벗어던지기가 힘들 수 있다. 흔히들 경찰 티가 난다. 군인 티가 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현직을 떠나서도 군인이나 경찰의 페르조나를 쓰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의 가면도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쓰고 생활하는 가면이 근원적인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요에 따라 쓰긴 쓰고 살지만 그것이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르조나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면 자신의 내적 세계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자기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게 된다. 직업상 썼던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는 심리적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진정한 자기,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자 불교인들의 수행이기도 하다.


페르조나는 필요한 가면이다. 상황에 맞게 잘 쓰는 사람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잘 맺는 원만한 사람이다. 시골에 가면 농부의 페르조나를 써야한다. 그런데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것이라면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다. 시간을 두고 배워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힘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투박한 언어도 배우고 은유적인 그들의 행동도 배우는 것이 좋다. 전통적인 시골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요즘 사람들과는 차이가 난다. 명절이라 선물을 들고 가도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나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왜 가져 와요.’ 하면서 선물을 보지도 않고 밀쳐두는 할머니들도 있다. 선물 주는 것을 호들갑떨며 반기면 다음에 또 가지고 오라는 의미로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귀농과 귀촌을 꿈꾼다면 물질적인 준비도 있어야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썼던 가면들도 벗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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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혼밥, 혼술, 혼족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인간 삶의 큰 변화이다. 인간은 무리지어 사는 것이 그 속성이다.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혼자 살기 보다는 함께 사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낫다는 뜻이다. 혼자 살면 결혼도 하지 않고 2세가 생길 까닭도 없다. 경제적인 측면만을 생각하면 혼자 사는 것이 더 이익인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결혼이란 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혹자는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라고 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을 자신의 권리이자 자연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부부관계를 맺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부부를 동반자(同伴者), 반려자(伴侶者)라고 하는데, ()이란 한자는 서로 짝을 짓는다는 뜻이다. 짝을 지음으로서 비로소 온전한 기능을 하게 된다. ‘버선 짝이 맞다, 신발짝이 맞다.’라고 할 때의 그 짝이다. 낱낱으로 존재할 때는 쓰임새가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함께 짝을 이루면 편리한 관계가 된다. 결혼은 신발짝처럼 하나로 합치면 편하고 온전할 것이라고 믿기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다보면 어긋나는 경우도 생기고, 똑같은 행동을 두고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 사람씩 각각으로 존재할 때는 문제될 수 없는 것들도 함께 생활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둘 만 있어도 질서가 필요하고 배려가 필요하다. 배우자에게 실망했다는 것은 결혼 전에 몰랐던 것들을 결혼 후에 알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대방의 깊은 마음이나 성격, 능력, 생활방식을 결혼 전에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귀를 닫게 한다. 그렇게 되면 더더욱 상대방의 부족한 면은 볼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까지도 매력으로 보인다. 상대방의 부족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서서히 나타난다. 그 때 가서 사람들은 후회하거나 속았다고 한다.

잘난 점이 있으면 못난 점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마음이 좋은 사람은 실속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거나 이기적일 수도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활발하지만 치밀하지 못할 수가 있고, 내향적인 사람은 치밀하지만 활동성이 모자라기도 한다. 좋은 점이 반이면, 부족한 점도 반이라고 생각하면 실망할 일도 줄어든다. 상대방의 좋은 점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또한 언젠가는 부족한 점도 드러날 것이라고 짐작을 하는 것이 좋다. 사랑에 취했을 때는 좋은 점만 보이지만 사랑이 식어지면 그 반대가 된다.

결혼(結婚)이란 말에서 혼()이란 글자 속에는 혼()의 의미가 들어 있다. 어둡고, 고단하고, 힘들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재미있고, 즐겁고, 편하고,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결혼이다. 지금까지 몰랐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늘어나고, 손아래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와 예절도 생겨난다. 결혼을 함으로써 혼자 살 때보다 할 일들이 더 늘어난다. 배우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도 세심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일들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결혼이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오랜 숙세(宿世)의 지중한 인연이 작용한 필연적인 만남이다. 부부만큼 상대방을 속속들이 아는 사이는 없다. 상대방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너무나 잘 알아서, 마치 서로를 진솔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된다.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은 고마운 존재이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얼굴도 살피고 차림새도 다듬는다. 못생기고 지저분한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고 거울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때로는 거북하고 불편한 존재가 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함이나 단점을 지적하고 충고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마움보다 원망과 분노를 느끼기가 쉽다. 남들에게 충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직장상사나 권력자들에게는 바른 말을 하기 보다는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는 말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부부는 비위나 맞추고 아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다가는 둘이 함께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를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도 한다. 가정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므로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할 수는 없다. 부부는 상대의 못난 점도 그대로 비춰줌으로써 서로에게 불편한 거울이 되기도 한다.

거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거울에 때가 많이 끼면 상대방을 제대로 비추어내지 못한다. 평소에 부지런히 거울을 닦고 때를 지워내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부부라는 거울이 완벽할 수는 없다. 거울이 잘못된 것인지, 상대방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를 탓하게 되고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음의 때를 닦는 일이기도 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때를 발견하듯이 부부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부부는 반려자, 동반자를 넘어 삶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스승이자, 진정한 도반(道伴)이 된다. 칭찬하는 스승보다 꾸짖는 스승이 수행에 더 많은 도움이 되듯이 편함보다 불편함을 주는 부부가 더 고마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혼밥, 혼술, 혼족이 때로는 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도 할 줄 알고 미워도 할 줄 아는 짝을 찾아서 서로의 거울도 되고 또 자식도 낳아 기르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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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상처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이른 새벽에 농부가 밭일을 나간다. 저 멀리 방죽위에 희미한 물체가 하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하얀 산토끼 같기도 한데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갓난아기이다. 흰 천의 강보에 포근하게 쌓여있는데 눈은 감은 채 손만 밖으로 내밀고는 꼼지락거린다. 봄날의 새싹처럼 가녀린 몸짓이다. 늦봄이기는 하지만 조석으로 냉기가 느껴지는 날씨인데 이른 새벽에 누군가가 어린 생명을 여기에 두고는 가버린 것이다. 농부는 밭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아기를 안고는 집으로 돌아 왔다.

시골 마을이라 아기의 사연은 쉽게 밝혀졌다. 도회지에 일하러 나갔던 착한 처녀가 임신을 해서는 친정집으로 돌아왔는데 결혼을 할 처지도 못되고 남자에게 의탁할 입장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친정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지만 처녀가 임신을 해 왔으니 부모님도 반길 까닭이 없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떠나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도 눈이지만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한 형편에 식구가 불어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처녀는 출산한지 3일 만에 핏덩이 아기를 안고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부모님도 모르게 눈을 피해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둘 다가 죽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방죽위에다가 아기를 내려놓고는 혼자 안개 자욱한 길을 따라 총총히 마을을 벗어나고 말았다. 천지신명님께 자식의 목숨만은 지켜달라고 간절하게 빌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때는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였다. 숟가락도 전쟁물자로 모두 공출을 당하던 시절이라 백성들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참혹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봄이면 보릿고개라 하여 마을마다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그나마 견디는 사람들도 몰골은 흉측했다. 먹거리가 없어서 독초나 복어를 잘못 먹고는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들도 흔하던 시절이었다. 입 하나 덜기 위해 열 살 남짓 되는 딸아이를 남의 집에 식모로 보내는 일도 흔히 있었고, 심지어는 겉보리 한 두 가마니를 대가로 받고는 딸자식을 시집보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아기는 다행히 마을에 살고 있는 아기의 먼 친척뻘 되는 할머니가 나서서 거두기로 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어머니의 얼굴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그 마을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할머니는 자식이 살고 있는 서울로 떠나게 되었는데 아이를 맡 길 곳이 없으니 서울 아들집으로 데리고 갔다. 때는 해방 직후였다. 서울에 사는 아들은 중앙부처의 국장이어서 대단히 잘 살았다. 가정부가 셋이나 있었고 명절이면 넘쳐나는 선물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집에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친구처럼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못했다. 신분의 차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은 본격적인 설움과 고통의 시작이었다. 음식이 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 있어도 가정부들은 맛있는 음식은 이 아이에게는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애써 아이를 지켜주려 했지만 아들 식구들과 가정부까지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갈등은 점점 커져갔고 나중에는 할머니도 어쩔 수가 없으니 아이를 붙잡고 그만 죽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아이는 슬픔과 외로움을 안으로 삼키며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며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청소년 시기에 집을 나와 버렸다. 다행히 그는 빗나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 열심히 노력했다.

지금 그는 참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다.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했다. 자신을 모질게 구박했던 사람들도 하나씩 용서하고 자기 안에서 화해했고, 생모의 별세 소식을 듣고는 그의 수행처에서 정성을 다해 49제를 모셨다. 그는 지금 자비심으로 오로지 중생을 보살피고 제도하는 일을 하신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난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생명의 존엄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달마대사는 자신을 치유하고 도에 이르는 네 가지 실천적인 방법을 가르치신다. 그것은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다. 보원행은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것을 되갚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수많은 생을 이어오면서 자신도 타인에게 억울함을 주었을 수 있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 당하는 억울함도 모두 갚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수연행은 자신에게 닥친 인연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다. 억지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 온 것은 또 인연에 의해 사라져 감을 알고 그대로 수순하며 살도록 가르친다. 중생들이 따르기에는 힘든 가르침이지만 옳은 가르침이다. 무소구행은 무엇을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은 커지게 마련이다. 탐심은 만병의 근원이다. 중생의 삶은 탐심을 근본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칭법행은 불법에 따라 살라는 가르침이다. 집착하지 말고 착각하지 말고 지나친 욕심은 내려놓고 보시하고 베풀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상처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상처를 딛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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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불안과 걱정과 고통에서 벗어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마음공부를 하기도 한다. 보다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 각자가 판단하고 생각한 일들을 하게 된다. 곳간을 많이 채워야 행복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물질을 탐하고 모을 것이며, 명예가 있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투를 잡으려 할 것이고, 날씬해져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몸매를 가꿀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각자의 성품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초기 수행공동체였던 그노시스(신지주의)학파에서는 인간의 수준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육체적 인간, 정신적 인간, 영적 인간이 그것이다. 육체적 수준의 사람들은 주로 물질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 정신적 수준의 사람들은 정신적인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영적 수준의 사람들은 종교적,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했다.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며 아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단계에 이르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주여! 하고 신을 찬탄하고 믿는다고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유식학에도 인간의 수준(씨앗)을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보살종성, 연각종성, 성문종성, 무성종성, 부정종성이 그것이다. 이런 수준은 선천적인 것이어서 개개인의 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각자의 수준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고 추구하는 행복의 수준도 다를 것이다. 아래 단계의 중생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고 자기 성장이지만 통찰이 깊지 않다면 자신의 수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성립된 심리학의 영역 중에 긍정심리학이란 것이 있다. 2009년에 국제학회가 창설되었으니 10년이 되지 못한 짧은 역사를 지닌 학문분야이지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설립된 학회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긍정심리학은 현존하는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적 문제를 파헤치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데 상당부분 기여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으며 문학은 인간의 삶을 더욱 향기롭게 만들었고 경제학은 인간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심리학은 인간의 삶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현재의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적 장애나 병리적인 측면 그리고 취약한 부분에 대해 주로 연구해 왔다면,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긍정적인 측면 즉 강점이나 훌륭한 덕성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는 심리학이다. 긍정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무엇이건 목표를 설정해두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59세의 어느 유명여자 가수는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려고 매일 하루 3시간씩 연습을 하여 실제로 대회에 출전했다. 폐지를 줍는 경우에도 하루 또는 한 달의 목표량을 정한다든지 또는 일정 금액을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질 때, 일하는 의욕이 더 생기고 행복감도 더 느끼게 된다.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넘어야 할 산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간다. 그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고 그들의 삶은 항상 의미가 따르게 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세월에 떠밀려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월을 헤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목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스스로에게 한 번 쯤은 물어봄직하다.
 둘째가 불필요한 비교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기보다 앞서거나 잘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비교하는 삶에 익숙하다. 오랜 경쟁으로 인해 그런 습성이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변을 살피고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것은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목표와 현재의 달성 정도를 비교한다. 즉, 타인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다. 
 셋째는 행복한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대처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건의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측면을 찾고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옛말에 ‘눈알이 빠져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지혜이다. 
 불교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근본적인 길을 ‘탐,진,치’ 삼독을 이기는 것이라고 한다. 욕망(탐심)은 고통의 근원이지만 욕망을 모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들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남을 미워하는 욕망, 부질없고 허황된 것을 바라는 욕망, 도를 넘는 지나친 욕망들도 대단히 많다. 그런 것들을 찾아서 극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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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제약산 그림자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겨울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 차례 눈이 내렸지만 대부분 녹아서 사라지고 산등성이 위로만 희끗희끗 보일 정도였다. 잠시 다녀왔지만 워낙 인상이 깊은 곳이어서 다시 찾아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물론 스님께 내약도 받아둔 상태였다.

 

스님 내일 갈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스님은 특유의 투박한 목소리로 오라고 하신다.

무얼 준비해 갈까요?”

그곳은 차량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 일용품을 등에 지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냥오라고 하신다.

곡차를 준비해 갈까요?”

거듭 물었더니 스님은 곡차는 두고 쌀을 조금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약간 걱정이 앞선다. ‘쌀이라?’ 가파른 산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하는데 쌀을 지고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괜히 졸라가며 물었나? 후회스런 마음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좋은 도량이라는 사연을 듣고 처음 그곳을 찾아갔을 때, 마음에 드는 장뇌삼을 한 뿌리 가지고 갔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장뇌삼을 부처님께 올리고 참배를 하고 나오니 암자 뒤편 산위에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한 분 계셨다. 화목을 준비하시다가 사람이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려오시는 중이었다. 스님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먼 길을 오셨다면서 공양부터 하라고 하신다. 공양을 하면서 법당에 장뇌삼을 올려두었으니 마르기 전에 드시라고 했더니 스님께서는 귀한 건데 한 번에 먹느니 술을 담겠다고 하셨다. 산속 암자라 공양주는 없었지만 거처하시는 곳은 정갈하고 고즈넉했다. 그것이 스님과의 첫 인연이었다.

 

스님께 드릴 공양물을 준비하는 일은 즐거웠다. 쌀은 8킬로만 넣고 과일도 조금 넣고 간식으로 드실 과자도 넣고 김도 넣고 된장 끓일 때 넣는 멸치도 조금 넣었다. 배낭은 이미 빈틈이 없다. 약간 무거운 느낌이 들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산 아래 내원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공양주 보살님을 찾아서 암자에 가는데 며칠 주차해 두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노스님 뵌 지 한 달은 넘었다면서 건강과 끼니를 걱정하신다. 그리고는 큰 봉지에 김장김치를 넣고 또 다른 밑반찬도 몇 가지 주시면서 갖다 드리라고 하신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지만 양손에 들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고 생각을 하니 좀 난감했다. 그러나 노스님이 은연중에 시키시는 좋은 수행이라고 생각하고는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갈수록 경사는 심해지고 비탈길에는 눈까지 달라붙어 있으니 고행하듯이 걸어야했다. 암자는 제약산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 해발 1000m는 좋을 듯했다.

 

노스님은 군불을 넉넉히 지피고는 기다리고 계셨다. 계곡을 따라 들어오다가 마지막에 수직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겨울바람은 차갑고 세찼다. 암자 마당에 걸린 빨래가 응원하는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눈 쌓인 암자이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편했다. 저녁공양을 하면서 뜬금없이 물었다.

혼자 계시면 외롭지는 않습니까?”

외로울 때가 있지요.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채전을 손보거나 산에 올라 나무를 하지요. 그러고 나면 그런 마음은 사라집니다.”

순수한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말씀이었다. 노스님이 손수 만드신 음식은 참 맛있었다. 특히 된장찌개는 진미였다.

내가 공양주를 오래했어요. 경전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해산 큰 스님을 뫼시고 공양주도 몇 년을 했지요.”

 

해산스님!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연이 닿았던 분들은 스님을 진정한 도인이라고 말씀하신다. 공양주를 했다면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셨을 터이다. 해산스님의 행적이 궁금했다.

그 분은 상()이 없었지요.”

노스님의 그 짧은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상이 없는 분그것으로 해산스님의 평가는 충분했다. 아상(我相)이 없다면 자신을 비운 분이다. 나를 비움이 무아(無我)이다. 공양주를 하면서 해산스님의 진상(眞相)을 보신 것이다. ‘상이 없었다.’ 는 그 말씀은 해산스님의 모든 삶을 담고도 남았다. 거기에 말을 더 보태면 사족이요 췌사일 뿐이다.

 

노스님은 처소에 드시고 나는 살을 에는 듯한 밤바람을 맞으며 몇 폭 남짓한 암자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간간이 풍경소리가 물결처럼 곱게 퍼져나가고 동천(冬天)의 별들은 처연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도량석 소리에 눈을 떴다. 지장전 앞에서 스님은 천수경을 하셨다. 투박한 독경소리는 우주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번뇌가 사라진 노스님의 독경은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으로 감로수처럼 스며들었다. 얼른 세수를 하고 법당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지장전인데 노스님은 예불을 마치시고는 관음정근을 하셨다. 1시간 남짓 정근을 하시고 스님은 처소로 가시고 나는 혼자 법당에 앉았다.

 

우리네 삶은 온통 상을 만들고 키우고 지키고자 한다. 세월이 흘러 이미 지나간 자신의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부여잡고 버둥거리기도 한다. 해산 큰 스님을 모셨던 노스님께도 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손수 공양을 준비하고 빨래하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들리면 그저 공양이나 하고 가라고 하시며 제약산의 산 그림자로 살고 계셨다.

 

하산 길의 눈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마음은 훈훈했다. 진불암 노스님의 상이 없었지요.’ 라는 말씀은 긴 여운을 남기며 귓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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