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필요한 가면, 페르조나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길어진 수명에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절박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인 여건이 되면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귀농을 적극적으로 권하며 지원방안들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고 귀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매우 필요한 노력들이다.
귀농이나 귀촌에는 물질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성찰과 노력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흔히들 시골 사람들의 텃세가 만만하지 않다는 말들을 하기도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베풀어야 이웃과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 행복하려면 보다 근원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핵심은 시골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에서 쓰던 가면은 벗어던지고 시골생활에 맞는 가면을 써야 시골의 삶에 적응할 수가 있다.
카를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심리학자요 정신과 의사이다. 서양의 심리학자이면서도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하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깊어서 티벳 불교의 구도자 파드마 삼바바가 저술한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학자들 중에 카를 융을 따를만한 사람이 아직은 없어 보인다. 불교심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식학과 닮은 점이 많아서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한 논문도 여러 편이 있다.
융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 중에는 ‘페르조나’라는 것이 있다. 하회탈처럼 가면이란 뜻이다. 하회탈에는 양반탈, 각시탈, 백정탈, 초랭이탈 등이 있다. 양반탈을 쓰면 비록 하인이라 할지라도 양반처럼 여유가 있고 늠름하게 행동해야 하며, 각시탈을 쓰면 수줍어하고 차분하게 행동해야 하고, 초랭이탈을 쓰면 경망스럽고 방정맞게 행동해야 한다. 가면(탈)의 성격(정체성)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얼른 생각하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해서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사람은 누구나 지위와 환경에 맞는 탈을 쓰고 산다. 그것이 타인과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페르조나는 타인을 속이기 위한 나쁜 의미의 가면이 아니라 신분과 체면을 지키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가면이다.
우리는 많은 가면들을 수시로 바꿔 쓰면서 살아간다. 하나의 가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회사원, 사장, 자식, 남편, 학교동창, 종교인, 향우회원, 군대친구, 술친구, 욕친구 등등이 있다. 자식들 앞에서는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사랑과 권위를 지키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자식의 가면을 쓰고 나이도 잊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애교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도 회사에 가면 사장으로서 위엄과 엄격 그리고 가혹한 모습도 보여야 한다. ‘욕 친구’를 만나면 모든 가면을 또 벗어던지고 소시적 욕하던 친구의 가면을 얼른 뒤집어 써야한다. 만약에 욕 친구 앞에서도 사장의 페르조나를 쓰고 거들먹거리거나 폼을 잡는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초등학교 시절의 순진하고 철없던 페르조나를 쓴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가면을 너무 오랫동안 쓴다면 벗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이 권위적인 가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법조인이나 경찰, 높은 지위의 군인으로 오래 생활했거나 정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가면을 벗어던지기가 힘들 수 있다. 흔히들 ‘경찰 티가 난다. 군인 티가 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현직을 떠나서도 군인이나 경찰의 페르조나를 쓰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의 가면도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쓰고 생활하는 가면이 근원적인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요에 따라 쓰긴 쓰고 살지만 그것이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르조나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면 자신의 내적 세계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자기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게 된다. 직업상 썼던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는 심리적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진정한 자기,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자 불교인들의 수행이기도 하다.
페르조나는 필요한 가면이다. 상황에 맞게 잘 쓰는 사람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잘 맺는 원만한 사람이다. 시골에 가면 농부의 페르조나를 써야한다. 그런데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것이라면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다. 시간을 두고 배워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힘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투박한 언어도 배우고 은유적인 그들의 행동도 배우는 것이 좋다. 전통적인 시골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요즘 사람들과는 차이가 난다. 명절이라 선물을 들고 가도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나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왜 가져 와요.’ 하면서 선물을 보지도 않고 밀쳐두는 할머니들도 있다. 선물 주는 것을 호들갑떨며 반기면 다음에 또 가지고 오라는 의미로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귀농과 귀촌을 꿈꾼다면 물질적인 준비도 있어야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썼던 가면들도 벗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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