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경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매일같이 구름이 자주 끼고 비도 자주 내리던 어느 가을날,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온실 속 식물원에 자리한 예쁜 카페 '온실리움'에서 대학원생 이경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식물원 특유의 달콤한 공기와 유리벽에 부딪쳐 흐르는 작은 빗방울들의 모습, 그리고 낮은 자리로 흐르는 그윽한 커피향의 이끌림 속에 이경화 선생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호스피스 봉사 시범사업이 연기되는 바람에... 2016년 9월에 시작해서 2018년 2월에 본 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또다시 연기되어 2019년도 9월에 하기로 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미 본 사업에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없는 상황이구요.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제가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초창기 멤버예요. 2014년도에 개원했을 때 입사를 했죠. 당시에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저하고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원래 호스피스에 관심이 있어서 초기에 입사하자마자 마하보디교육원에서 하는 생사의 장 교육(불교호스피스교육)을 먼저 받았어요. 그 때는 대학원에 들어오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죠.
그런데 제가 병원에 계속 근무하던 중 2016년도에 우리 병원에서 호스피스 봉사 시범사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능행 원장 스님께서 호스피스 사업을 하는 사람은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 임상보디사트바교육)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마하보디교육원에서 CPE 교육을 받게 되었죠. CPE가 마하보디교육원 프로그램의 하나잖아요.
그런데 CPE 교육을 받아보니 너무 괜찮은 거예요. 감동 받았어요. CPE 교육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몰랐던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을 스님께서 끄집어내 주시니까요. 그러면서 "어, 이게 뭐지?" 하면서 이 분야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아, 한번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해서 마하보디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죠.
CPE 교육 프로그램이 기본과정, 전문가 과정, 지도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속 교육 이수를 하셨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시간이 없었습니다, 대학원 공부 때문에(웃음). 2차, 3차 교육 이수는 안했습니다. 제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다른 공부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최초의 불교호스피스병원이기도 하고 제가 책임자니까 우리 병원 공동체 안에 있는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대해서도 알아야 되겠다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구요.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와 보니 이런 수준은 정말 도전이죠. 그런데 힘들지 않아요(웃음).
대학원에 입학하셨을 때의 첫 마음은 어떠셨는지요?
첫마음은 호기심이었죠. 여기서 무엇을 가르칠까? 들리는 소문에 다른 곳에서 하는 흔한 학문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제가 무엇을 파악해서 하는 성격은 아니라 일부러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외부에서 가르치는 공부나 이런 쪽은 아니고 마음, 자기를 알아가는 그런 공부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아주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내가 나에 대해 더 알 필요가 뭐 있어?’ 그랬는데 CPE 교육을 받으면서 제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쪽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뭔가를 가르쳐준다 하니까, 한번 해보자 하고 온 거예요. 호기심이죠.
지난 학기 학생회장으로서 학생회를 잘 이끌어 주시고 다음 학생회장에게 소임을 넘기셨는데, 소회 한 말씀 해주시죠.
작년 기수가 회장직을 넘기면서 우리 동기 세 명 중에 한 사람이 회장을 맡아야 했어요.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았거든요. 사실 부담감은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긴 하지만 어차피 주어진 일이니까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회장을 하게 되면 중간 이상만 하자,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서 그냥 받아들이고 한 거예요. 그것도 다 도전이에요, 저에게는.
그런데 선두에 서셨어요(웃음). 대학원도 그렇지만 입사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뭔가에 도전하게 하는 이곳에 머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맨 처음 제가 능행 스님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를 읽고 이 병원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병원이라는 곳이 다 조직이잖아요. 보통 조직에서 요구하는 것은 같아요. 그냥 일 잘하고 그러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곳은 뭔가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마음이라든지, 일 중심이라기보다는 환자를 어떻게 대할지, 사랑이라든가 케어라든가 하는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커다란 이유가 있어요. 우리 병원만의 임종의식이 있거든요. 제가 병원 생활을 오래 해서 알지만, 보통 병실에서 죽으면 시체가 바로 안치실 냉장고에 안치되잖아요. 일반 호스피스 병동뿐만 아니라 다른 병동에서도 무조건 그렇게 해요. 그런데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는 우리 병원만의 8시간 임종의식을 해요. 진정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품위를 지키고 돌아가실 데는 바로 여기밖에 없죠.
다른 병원들은 경제적인 논리로 환자분이 돌아가셔도 8시간을 병실에 놔두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돌아가신 임종자가 침대에 계속 누워 계시고 가족들도 함께 계시면서 이별의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배려를 해드려요. 가족들로서는 8시간도 충분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시간에 배려를 해드리는 거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 나중에 사별 가족들의 감정이 조금 완화되는 것 같아요. 가족들이 간호를 하면서 계속 환자 곁에 있었다 해도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가시면 엄마~ 아빠~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바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는 그런 여운을 정리할 수 있는,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는 거예요. 제 석사 논문 주제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호스피스 병원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지켜보는 죽음 때문에 힘들어서 병원을 떠난다고 말씀하시는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가 않아요. 제가 받은 CPE 교육, 생사의 장, 대학원 수업, 이런 것들이 다 연계성이 있어요. 제게 힘이 생긴 거죠, 힘이. 저는 불교는 잘 몰라요. 그런데 이곳에 교육을 받으러 오는 교육생들은 불교에 많이 심취해 있으면서 깊이도 있고 그러시더군요. 저와 대화의 깊이가 다른 거예요. 처음에는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거, 단어도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뭔가 나아지겠지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공부를 계속 하면서 얻은 것이 있어요. 마음을 살피는 것, 가족뿐만 아니라 환자분들의 마음까지도요. 기술적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다가갈지 몰랐던 부분을 배우게 되니 도움이 되었죠. 그것도 힘이 된 거죠.
저는 환자분들을 보내드릴 때 보람을 느껴요. 사람은 누구나 죽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인데, 우리 병원에서는 너무나 존엄하게 돌아가실 수가 있다는 거죠. 저는 우리 병원에서 마지막 임종을 하시는 분들은 복 지은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가실 때스님들도 오시고 다른 분들도 오셔서 인간으로서 아주 품위 있게 돌아가실 수 있게 해주시잖아요. 아름다운 모습으로요. 다른 병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들이죠, 아름다운 환자들의 모습은.
시신을 모시는 업체분들도 우리 병원에 오시면 엄숙해져요. 그분들도 다른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여러 번 모셔봤을 테지만, 여기는 다르거든요. 그래서 그분들도 처음에는 덜렁덜렁 왔다가 엄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우리 병원 그 부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횟수로 보면 제가 임종을 100번 이상 봤을 걸요? 한 분에 8시간씩이니까, 800시간 정도 되겠네요. 적지 않은 시간이죠. 거기서 배운 것은, 잘 살아야지라는 것이에요. 선한 마음으로, 내 이 선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잘 살아내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요. 끝도 괜찮으신 분이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현재 4학기 재학중이신데 그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저는 심플해요. MT 갔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웃음) 김경일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함께 우중산사 통도사에도 갔었고, 공룡 발자국 있는 데 반구대에도 갔었죠. 교수님과 학생들이 함께 MT를 가니까 친밀감도 확 느껴지고 좋았어요. 다 제가 학생회장일 때 간 거네요. 제 성향이 그래서인지 먹고 쓰는 것에 투자를 많이 했네요.(웃음)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었는지요?
가족이죠. 엄마 아빠는 다 돌아가셨지만 자매들 간에 우애가 정말 좋아요. 우리 자매들은 안 보면 안 되는 사이예요. 그리고 우리는 무조건 어디든 같이 놀러 다녀요. 남편 빼고 자매들끼리만 놀러다닐 때도 있고요.(웃음)
10년 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열심히 잘 살았네. 그리고 그 때도 여기서 일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 때는 나이가 있으니 길게 일할 수는 없겠죠, 젊은 사람들도 여기에서 일하고 싶어할 테니까요. 그래서 4시간 정도? 아니면 일주일에 3일? 그리고 65세 정도 되면 그 때는 놀러 다녀야죠.
우리 웹진 이름이 ‘마음’이잖아요. 선배님이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신다면요?
마음은 나 자신이죠. 표현이 다 되니까. 또 하나 있는데, “마음은 역마살”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도 때도 없이 변하니까요.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경화도 (대학원) 다녔다. (웃음) 당신은 뭐든 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