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문 자리교육을 통한 생각들, 느낌들, 책이나 영화, 그 무엇에선가 문득 마음이 머무는 그 어느 구절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머문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보세요.

지금 여기, 이 순간

 

송 형 준 2018 봄 시민무료특강 <치유와 성장의 힐링극장> 참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3번째 봄시민 특강에 출석하기 위해 부산 온천장 전철역에서 동료들을 만나 함께 언양으로 출발하였다. 이번 특강은 치유와 성장의 힐링극장4강 중 3번째 영화 <소중한 사람, 2002 일본>이다.



<소중한 사람>은 가족영화이다. 가족 중 할머니는 치매 환자이다. 할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는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고 가족 간에도 마찰이 일어나는 일들이 자주 발생되곤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비록 할머니(남편의 어머니)가 간병하기 힘이 드는 치매환자이지만 함께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정의 안정을 위해 부득이 치매 요양원으로 모시고 가는 도중 이 영화는 새로운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며느리가 가지고 있던 시어머니를 향한 원망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그 동안 자식에게도 하지 않았던 당신의 과거 일들을 덤덤히 말씀하신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성장해서도 지워지지 않았고, 일찍 결혼하여 자식 셋을 두었는데 갑자기 남편을 잃고 젊은 나이에 홀몸으로 자녀 셋을 어렵게 키워야 했던 이야기 등. 시어머니는 처음으로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둔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꺼내 보인다


며느리는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시어머니가 애처롭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연약한 여자로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녀들을 잘 키워 모두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했던 시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며느리는 그 동안 비록 한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면서도 왜 사는가에 대한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치매노인을 돌보며 사는 것이 그녀로서는 의미없는 삶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시어머니에 대한 측은하고 애처로운 삶에 대한 동정심도 들었지만 그 감정보다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로 인하여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삶의 의미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이제는 이전의 며느리가 아닌 새로운 며느리로 변화가 되니 생활이 바뀌고 남편은 물론이고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행복이 찾아온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이젠 가족조차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가족 모두는 그러한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예전과 다름없이 가족의 일원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할머니지만 언제나 며느리에게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영화 <소중한 사람>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삶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영화로서 삶의 의미를 알고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그 의미가 주는 삶의 책임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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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콤플렉스, 외면당한 또 하나의 나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콤플렉스는 불편한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평온하게 유지되다가도 콤플렉스가 자극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감정이 요동을 쳐서 당황하거나 허둥되면서 평상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콤플렉스는 자신 안에 고요히 숨어서 지내는 감정의 덩어리다. 죽은 듯이 있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일어나서 반응을 보이는 존재이다. 마치 아직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소.” 하고 소리치는 존재이다. 콤플렉스는 내 안에 살지만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이단아, 반항아 같은 존재이다. 불편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엾은 존재이기도 하다. ‘외면당한 또 하나의 나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는 해결되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이기도 하고, 억울하고 무시당해서 생긴 풀리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기도 하다. 또한 남에게 자랑스럽게 내 놓을 수 없어서 숨기고 싶은 열등감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콤플렉스는 존재한다. 다만 힘(에너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강력한 것을 지닌 사람도 있고 소소한 것을 지닌 사람도 있다. 에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콤플렉스는 위험한 것이다. 마치 신체의 암과 같은 존재이다.

강의를 하는 중에 어떤 중년의 부인이 주위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오더니 불쑥 내가 바보여서 그렇습니다.”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제 자리에 가서 앉는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금방 하던 강의 내용을 잠시 돌이켜보니 남편의 외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부인은 배우자의 외도에 관한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 아닌가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콤플렉스는 의식의 흐름을 멈추게도 한다. 의식을 회복하게 되면 대개 깊은 후회를 하게 된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이처럼 콤플렉스는 불편한 존재이다.

불교상담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보살님 한 분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잠시 울먹인다. 함께한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약간 놀라는 시선을 보낸다.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는다. 5살 무렵에 본인이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단다. 어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인근 고을에 한의사가 있긴 한데 집에서 진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5일장을 따라다니며 장바닥에서 침도 놓고 뜸도 뜨고 약 처방도 해주는 그런 의사였다. 어머니는 그 한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그가 가는 5일장을 모조리 따라다녔다고 한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소달구지에 딸아이를 태워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소아마비에 좋다는 밤을 사다가는 삶아서 한 그릇씩 딸아이에게 먹이기도 했다. 5살짜리 어린소녀는 소달구지에 실려 5일장을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과 지극한 정성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누가 어머니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어린 시절, 그 감정이 봇물처럼 밀려올라와 주체하지를 못한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덩어리이고 그것이 콤플렉스의 일종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가슴에 응어리져서 풀리지 않는 것으로 삶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이다. 자유로워지려면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다. 고마운 마음만 가슴에 남기고 지난 날의 감정에서는 벗어나는 것이 콤플렉스의 극복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머도 뛰어나고 술도 잘 마시고 대인관계도 원만한데 유독 가창에 대해서는 강력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2차로 노래방에 갈 일이 있으면 언제나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같이 간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남들은노래를 잘 못하면 어때, 하는 대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사자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노래를 잘못 불러 심하게 창피를 당했다거나, 어릴 때 아주 불쾌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콤플렉스는 타인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깐 일로 뭘 그래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체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들도 있다. 어떤 부인은 초등학교 시절에 팔에 골절상을 입고는 수술을 했는데 전문의가 없는 시골에서 한 탓에 완치가 되어서도 팔이 약간 안쪽으로 휘어버렸다. 친구들에게 더러 놀림을 당하고는 팔을 내 놓고 다니지를 못했다. 한 여름에도 항상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해서는 긴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6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부인은 항상 긴팔의 옷만 입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춘기의 학생들은 더욱 심하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입시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성형외과 수술 예약은 넘쳐난다. 쌍꺼풀 수술은 기본이고 코를 높이고 턱을 다듬기도 하고 얼굴 곳곳을 성형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가장 좋긴하지만 그것이 힘들면 오히려 성형을 해서라도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콤플렉스가 누적되고 심해지면 심리적 증상은 다른 곳으로 옮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인기피증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잘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극복해서 보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 콤플렉스에 짓눌려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콤플렉스의 극복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억울했던 감정도 피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받아들여야 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감정도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그때 그랬지, 참 힘들었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래를 못하는 것도 피하지 말고, ‘나는 원래 노래를 못해 못하면 못하는 대로 부르지 뭐. 그것 때문에 욕을 하겠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두려움도 줄어들게 된다. 콤플렉스는 받아들이면 성장의 발판이 되고 숨기면 심리적 장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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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필요한 가면, 페르조나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길어진 수명에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절박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인 여건이 되면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귀농을 적극적으로 권하며 지원방안들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고 귀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매우 필요한 노력들이다.


귀농이나 귀촌에는 물질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성찰과 노력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흔히들 시골 사람들의 텃세가 만만하지 않다는 말들을 하기도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베풀어야 이웃과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 행복하려면 보다 근원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핵심은 시골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에서 쓰던 가면은 벗어던지고 시골생활에 맞는 가면을 써야 시골의 삶에 적응할 수가 있다.

 

카를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심리학자요 정신과 의사이다. 서양의 심리학자이면서도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하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깊어서 티벳 불교의 구도자 파드마 삼바바가 저술한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학자들 중에 카를 융을 따를만한 사람이 아직은 없어 보인다. 불교심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식학과 닮은 점이 많아서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한 논문도 여러 편이 있다.


융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 중에는 페르조나라는 것이 있다. 하회탈처럼 가면이란 뜻이다. 하회탈에는 양반탈, 각시탈, 백정탈, 초랭이탈 등이 있다. 양반탈을 쓰면 비록 하인이라 할지라도 양반처럼 여유가 있고 늠름하게 행동해야 하며, 각시탈을 쓰면 수줍어하고 차분하게 행동해야 하고, 초랭이탈을 쓰면 경망스럽고 방정맞게 행동해야 한다. 가면()의 성격(정체성)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얼른 생각하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해서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사람은 누구나 지위와 환경에 맞는 탈을 쓰고 산다. 그것이 타인과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페르조나는 타인을 속이기 위한 나쁜 의미의 가면이 아니라 신분과 체면을 지키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가면이다.


우리는 많은 가면들을 수시로 바꿔 쓰면서 살아간다. 하나의 가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회사원, 사장, 자식, 남편, 학교동창, 종교인, 향우회원, 군대친구, 술친구, 욕친구 등등이 있다. 자식들 앞에서는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사랑과 권위를 지키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자식의 가면을 쓰고 나이도 잊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애교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도 회사에 가면 사장으로서 위엄과 엄격 그리고 가혹한 모습도 보여야 한다. ‘욕 친구를 만나면 모든 가면을 또 벗어던지고 소시적 욕하던 친구의 가면을 얼른 뒤집어 써야한다. 만약에 욕 친구 앞에서도 사장의 페르조나를 쓰고 거들먹거리거나 폼을 잡는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초등학교 시절의 순진하고 철없던 페르조나를 쓴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가면을 너무 오랫동안 쓴다면 벗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이 권위적인 가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법조인이나 경찰, 높은 지위의 군인으로 오래 생활했거나 정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가면을 벗어던지기가 힘들 수 있다. 흔히들 경찰 티가 난다. 군인 티가 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현직을 떠나서도 군인이나 경찰의 페르조나를 쓰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의 가면도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쓰고 생활하는 가면이 근원적인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요에 따라 쓰긴 쓰고 살지만 그것이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르조나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면 자신의 내적 세계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자기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게 된다. 직업상 썼던 페르조나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는 심리적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진정한 자기,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자 불교인들의 수행이기도 하다.


페르조나는 필요한 가면이다. 상황에 맞게 잘 쓰는 사람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잘 맺는 원만한 사람이다. 시골에 가면 농부의 페르조나를 써야한다. 그런데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것이라면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다. 시간을 두고 배워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힘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투박한 언어도 배우고 은유적인 그들의 행동도 배우는 것이 좋다. 전통적인 시골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요즘 사람들과는 차이가 난다. 명절이라 선물을 들고 가도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나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왜 가져 와요.’ 하면서 선물을 보지도 않고 밀쳐두는 할머니들도 있다. 선물 주는 것을 호들갑떨며 반기면 다음에 또 가지고 오라는 의미로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귀농과 귀촌을 꿈꾼다면 물질적인 준비도 있어야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썼던 가면들도 벗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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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혼술, 혼족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인간 삶의 큰 변화이다. 인간은 무리지어 사는 것이 그 속성이다.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혼자 살기 보다는 함께 사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낫다는 뜻이다. 혼자 살면 결혼도 하지 않고 2세가 생길 까닭도 없다. 경제적인 측면만을 생각하면 혼자 사는 것이 더 이익인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결혼이란 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혹자는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라고 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을 자신의 권리이자 자연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부부관계를 맺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부부를 동반자(同伴者), 반려자(伴侶者)라고 하는데, ()이란 한자는 서로 짝을 짓는다는 뜻이다. 짝을 지음으로서 비로소 온전한 기능을 하게 된다. ‘버선 짝이 맞다, 신발짝이 맞다.’라고 할 때의 그 짝이다. 낱낱으로 존재할 때는 쓰임새가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함께 짝을 이루면 편리한 관계가 된다. 결혼은 신발짝처럼 하나로 합치면 편하고 온전할 것이라고 믿기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다보면 어긋나는 경우도 생기고, 똑같은 행동을 두고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 사람씩 각각으로 존재할 때는 문제될 수 없는 것들도 함께 생활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둘 만 있어도 질서가 필요하고 배려가 필요하다. 배우자에게 실망했다는 것은 결혼 전에 몰랐던 것들을 결혼 후에 알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대방의 깊은 마음이나 성격, 능력, 생활방식을 결혼 전에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귀를 닫게 한다. 그렇게 되면 더더욱 상대방의 부족한 면은 볼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까지도 매력으로 보인다. 상대방의 부족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서서히 나타난다. 그 때 가서 사람들은 후회하거나 속았다고 한다.

잘난 점이 있으면 못난 점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마음이 좋은 사람은 실속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거나 이기적일 수도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활발하지만 치밀하지 못할 수가 있고, 내향적인 사람은 치밀하지만 활동성이 모자라기도 한다. 좋은 점이 반이면, 부족한 점도 반이라고 생각하면 실망할 일도 줄어든다. 상대방의 좋은 점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또한 언젠가는 부족한 점도 드러날 것이라고 짐작을 하는 것이 좋다. 사랑에 취했을 때는 좋은 점만 보이지만 사랑이 식어지면 그 반대가 된다.

결혼(結婚)이란 말에서 혼()이란 글자 속에는 혼()의 의미가 들어 있다. 어둡고, 고단하고, 힘들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재미있고, 즐겁고, 편하고,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결혼이다. 지금까지 몰랐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늘어나고, 손아래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와 예절도 생겨난다. 결혼을 함으로써 혼자 살 때보다 할 일들이 더 늘어난다. 배우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도 세심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일들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결혼이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오랜 숙세(宿世)의 지중한 인연이 작용한 필연적인 만남이다. 부부만큼 상대방을 속속들이 아는 사이는 없다. 상대방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너무나 잘 알아서, 마치 서로를 진솔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된다.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은 고마운 존재이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얼굴도 살피고 차림새도 다듬는다. 못생기고 지저분한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고 거울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때로는 거북하고 불편한 존재가 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함이나 단점을 지적하고 충고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마움보다 원망과 분노를 느끼기가 쉽다. 남들에게 충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직장상사나 권력자들에게는 바른 말을 하기 보다는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는 말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부부는 비위나 맞추고 아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다가는 둘이 함께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를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도 한다. 가정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므로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할 수는 없다. 부부는 상대의 못난 점도 그대로 비춰줌으로써 서로에게 불편한 거울이 되기도 한다.

거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거울에 때가 많이 끼면 상대방을 제대로 비추어내지 못한다. 평소에 부지런히 거울을 닦고 때를 지워내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부부라는 거울이 완벽할 수는 없다. 거울이 잘못된 것인지, 상대방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를 탓하게 되고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음의 때를 닦는 일이기도 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때를 발견하듯이 부부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부부는 반려자, 동반자를 넘어 삶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스승이자, 진정한 도반(道伴)이 된다. 칭찬하는 스승보다 꾸짖는 스승이 수행에 더 많은 도움이 되듯이 편함보다 불편함을 주는 부부가 더 고마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혼밥, 혼술, 혼족이 때로는 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도 할 줄 알고 미워도 할 줄 아는 짝을 찾아서 서로의 거울도 되고 또 자식도 낳아 기르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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