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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01 잘못도 인정하기 나름
  2. 2017.10.31 [천천히 읽는 명상]불일치, 정신장애의 원인

[천천히 읽는 명상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잘못도 인정하기 나름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세상에 부족하지도 않고 결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신은 완전하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닐까 싶다. 만약 신이 완전하다면 그것을 행위로서 인류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적이 있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천재지변과 전쟁의 공포가 그친 적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길게 이어진 전쟁이 바로 종교전쟁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참수하지만 신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다. 기껏 전해오는 소리는 너희들이 죽으면 심판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라는 확인할 수 없는 메시지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존재이니 허물을 논할 수가 없다. 개는 개로 살고 소는 소로 살고 소나무는 소나무로 살아간다. 우열이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 자연의 법칙 안에서 평등한 생존을 이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에고와 의지로서 살아갈 뿐 아니라, 항상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생기게 마련이다. 관계 속에서 갈등을 잘 해소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수행자들도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수행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주로 혼자서 수행의 길을 간다. 무엇이 옳은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생물학적으로 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무리 속에 있으면 허물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를 쉽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들을 쉽게 하는 사람도 있고 매우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수가 있다. 어린 시절에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심하게 혼이 나거나 질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을 수 있고, 어릴 때에 잘못된 행동을 이해받고 용서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보다 쉽게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행동양식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에 심리적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파탄이 두려워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가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행동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건성으로 뉘우치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아강도가 약하거나 주체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잘 하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신의 존재감이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정상적이고 고마운 충고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끝까지 부정하거나 변명을 한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깊이 성찰하는 능력과 태도가 부족하다. 역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센 사람들이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잘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도 배려하고 타인도 배려하는 사람들이다. 무작정 타인을 따르지도 않고 완고하게 자신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잘못이 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고, 잘못이 없을 때는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간에 잘못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간단한 것 같아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동안 이미 쌓아온 습()이 있어서 그것을 금방 씻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가?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나무란다면 깊이 성찰하지도 않고 그들의 지적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처세술로는 좋을지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것이다.


맹자의 가르침에 이런 것이 있다. 타인이 자신을 욕하거나 비난하면 우선은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의 잘못을 찾을 수가 없다면 욕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다시 들어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타인의 문제를 붙잡고 그것을 해결해 주려고 내가 안달할 필요는 없다. 그냥 두면 된다. 참 좋은 가르침이다.

 


 허물과 과오가 없는 사람들은 없다. 부족하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사바세계의 삶이다. 누군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면 고쳐야 한다. 그래야 발전과 성장이 있다. 그러나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건성으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잘못이 있을 때 잘못했다 하고, 없을 때는 없다고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운명적인 한계는 도사리고 있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살피기 때문에 항상 왜곡과 착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에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항상 자기 입장에서 자기를 살피기 때문에 합리화라는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즉 자신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속성을 지닌 것이 바로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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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는 명상]

천천히 읽는 명상의 주인공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입니다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일치, 정신장애의 원인

 

김경일 │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일치시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또 바라는 이익에 따라 사람들은 적당하게 말을 꾸미며 살아간다. 그것을 처세술이라 한다면 크게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불일치한 행동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행태이기도 하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표리부동이란 말도 있다. 같은 의미이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하는 시조 역시 행동이 불일치한 사람들을 나무라는 내용이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에는 선비정신이란 것이 있어서 언행일치가 사람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간신들이 우글거리는 정치판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 훌륭한 선비들이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되곤 했다.

불일치의 근본 원인은 우리의 정신이 통합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자신이 아는 정신인 의식이 있고 자신이 모르는 마음인 무의식이 있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식으로 아무리 다짐을 하고 각오를 해도 자신이 모르는 무의식이 움직이면 의식의 결정은 힘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도박을 안 하겠다고 각오하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지만 그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구에 비유하면 의식은 땅의 껍데기이고 무의식은 땅속을 의미한다. 땅 밑이 움직이면 땅 표면은 맥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드는 불일치를 좀 더 학문적으로 풀이했다. 인간의 성격은 무의식적 욕구가 중심을 이루는 이드(ID)와 개인의 이기성이 중심이 되는 에고(ego)와 도덕적 행위 또는 이타행이 중심이 되는 슈퍼에고(super 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셈인데 이들이 추구하는 욕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만약에 자식이 효자 소리도 듣고 싶고 재산 상속에서도 손해 보기가 싫다고 하면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두 가지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자 하니 불일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했다. 그것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무의식성을 통찰하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자신을 알아차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불일치한 삶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면 정신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다.

다중 성격장애(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정체감(특성)을 지닌 인격이 존재함을 말한다. 이런 경우는 하나의 통일된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 성격의 이중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질환을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자기 삶의 불일치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과 모르고 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도덕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정신장애는 아니지만 모르고 행동하는 것은 정신장애에 해당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일치한 행동을 하면서도 정신장애에 걸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겉과 속이 다름을 스스로 알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중성격장애로 진단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위빠사나 수행 또는 사티 수행 역시 알아차림이 근본이다. 내 안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그것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언행의 불일치를 알아차리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불교대학에 열심히 다니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색한 편이긴 하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에서는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물론 인정욕구와 이기성에 바탕을 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외관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 사람은 남들이 돈도 좀 쓰고 선행도 하라.’고 하면 나는 장사꾼입니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정직한 표현이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또 다른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돈 벌어서 뭐하느냐, 좋은 일 하라고 버는 거지.’ 라는 말을 곧장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는 장사꾼입니다.’ 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은 알 수는 없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불편함이 적고 잠도 잘 잔다. 특별히 잔꾀를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묘수들을 찾아야 하므로 사는 것이 좀 피곤할 수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잠들지 못하고 또 새벽에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계산이 복잡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불일치로 인한 갈등은 줄어든다. ‘사람 좋다라는 말도 듣고 싶고 이익도 챙기고자 한다면 머리를 많이 써야한다.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도 불일치 현상이다. 하나로 통합해서 살아야 편하다. 이래야 좋은 건지 저래야 좋은 건지를 두고 밤잠을 설치며 생각을 이어간다면 힘 들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자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는 편안하고 남들에게는 믿음을 준다. 하나의 자기를 온전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그렇게 노력해 가는 것이 성장이고 성숙이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카를 융은 자신에 대한 무의식성, 즉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을 정신장애라고 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의미한다. 즉 내면의 자기를 통찰한다고 해도 되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업을 알아차리고 극복하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은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목적이 될 것이다. 즉 하나 된 자기, 일치된 자기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들이다

Posted by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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