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머문 자리

이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2019. 7. 16. 17:54

[만남이 머문 자리] 정성스러운 만남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이 위치한 정토마을에는 아주 특별한 병원이 있습니다. 바로 불교계 최초의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자재요양병원입니다. 그곳이 오늘 만나볼 대학원생 이현 선생님의 근무지랍니다.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계시죠. 늘 보아도 시원시원한 말투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유쾌한 웃음, 멀리서도 금새 알아볼 만큼 힘차고 빠른 발걸음으로 병원을 누비고 다니는 이현님. 그런데 한동안 이현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여유롭게 차 한잔 함께 나눌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답니다. 오늘 마침 이현 선생님이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앞동네 궁근정리에  '별이 나린'이라는 멋진 카페가 있다고 추천해 주셔서 당장 함께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전원 카페 주인장님이 "뷰"가 가장 예쁜 자리를 마련해 주시길래 우리도 가장 비주얼이 좋은 차를 골라서 시킨 뒤 (물론 맛은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죠~) 이야기 보따리를 풀러보았습니다. 

 

 

- 반갑습니다. 먼저 석사 5학기 수료를 축하합니다. 학기를 모두 마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5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요. 사실, 처음 입학했을 땐 막막했어요. 대학원 석사 과정 5학기면 2년 반인데 제 인생에서 이 2년 반이 어떻게 쓰여질까 무섭기도 하고, 이게 잘하는 것인가 불안하기도 했죠. 그런데 누구 말처럼 발을 걸쳐놓으니까 끝나기는 하네요.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일 때문에 부득이 수업에 빠진 적도 있긴 했지만 아주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많이 배우기도 했구요.

 

 

- 간호학이 전공이신데 대학원 전공으로 명상심리학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부분은 기사에서 빼셔도 되는데요(웃음). 꼬드김에 넘어간 거죠, 능인 스님(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영적돌봄 연구실장)께. (웃음) 간호학과 공부는 학교 다니면서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공부라는 게 끝이 없다는 것 맞아요. 그렇지만 일을 해보니 저에게는 간호학 공부보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가 마침 제가 전라도에서 귀농을 해서 살다가 이쪽으로 이사를 왔을 때인데,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명상심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있었죠. 그땐 명상이 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요.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게 명상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명상 수업을 해보니 '너무 흥미로워, 너무 재미있어',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힘주어)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구요!!

 

-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셨나요?

 

우선, 김경일 주임교수님께 들었던 심리학 수업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왜 그러는지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내면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저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럴까를 보는 거죠. 그 전에는 그냥 환자, 보호자, , 직원, 이렇게만 구분이 되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금함 이런 게 생기기 시작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구요. 그 전에는 상대방에게 "이러시면 돼요" "이러시면 안 돼요" 했다면 지금은 ", 그렇군요" "그러셨군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제가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능인 스님께서 지도하시는 CPE(정토마을 자재병원 CPE센터) 수업까지 같이 들었는데요. 그래서 더 시너지 효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처음 여기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았는데 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중환자실에서는 감정이랄 게 없어요. 이 사람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게 죽은 삶이든 살아 있는 삶이든 어차피 이 사람에게 트리트먼트를 해주는 것, 그것이 목적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감정을 가지지 말아야지, 이 사람과의 관계에 선을 그어야지'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무너진 거예요. 호스피스 병원의 특성상 옆에 계속 가게 되고, 얼굴을 보고 표정을 살피게 되고, '아 이건 싫다는 건데, 이건 좋다는 건데'를 알게 되더라구요. 이제 눈빛만 봐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랬던 분들이 임종을 하시는데, 일방적으로 관계가 끊김을 당하는 느낌. 말로는 그러죠. '참 잘 살아오셨어요. 조심해서 가시고,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가시라'고. 하지만 말로만 그렇죠, 다 생각나요. ', 그 동안 내가 중환자실에서 감정 없이 보낸 분들에 대한 벌이구나.' 환자 한분 한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중에는 제가 감정적으로 무너진 모습도 보였죠.

 

한번은 TV에서 중학생들이 노숙자 할아버지가 겨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입고 있던 몇십만 원짜리 패딩점퍼를 벗어서 입혀드리고 업고 집에 모셔다드린 뉴스를 봤거든요. 너무 예쁜 얘기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고 미친 듯이 울었어요. 감정이 무너지는 걸 느낀 거죠. 이게 좋은 건지, 슬픈 건지 그게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슬픈 것, 좋은 것, 감동적인 것 중에 감동적인 거잖아요. 칭찬해줄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감정이 무너진 거예요. TV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면 애들이 저한테 "엄마 또 울어?" 하고 물어요. 힘들더라구요.

 

지금은 무너졌다는 느낌은 받지 않아요. 그 전에는 제 감정을 숨겨야 프로라고 생각했었죠.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려면 감정? 배제해야지. 내가 슬퍼도 고객인데 웃어야지, 잘해드려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뭐 어때? 나도 사람인데, 울고 싶으면 우는 거지.' 그런 마음이 되니까 이젠 대놓고 울어요. 애들 보는데서도 "슬프지 않니?" 하면서 울고. 지금은 그렇게 바뀌었죠.

 

이렇게 되기까지 능인스님께서 굉장히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에게 "감정을 그렇게 꼭꼭 눌러놓고만 있느냐, 아무도 이현 선생을 프로답지 못하다 저 사람 뭐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 오히려 더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렇게 얘기해 주셨죠. CPE 교육을 하시면서 굉장히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항간에는 착해졌다는 말도 들었어요. 예전에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선생님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거든요. CPE 교육 끝나고 "너 참 온순해졌어. 카리스마가 다 없어졌어. 너답지 않아" 그런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손가락으로 눈을 위로 당기며) 눈이 이렇게 됐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쳐져 있대요. 그 사건을 계기로, 그렇게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내 안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변화가 된 거죠.

 

-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해오셨잖아요.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 지금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을까요?

 

제가 얼마 전에 느낀 건데요. 저는 항상 '제가 잘한다'의 기준이 80점었어요. 엄마로서도 80, 간호사로서도 80, 딸로서도 80, 며느리로서도 80, 80점 이상은 되어야 '잘한다' '할 만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저를 힘들게 하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을 해보니까, 엄마 이현도 나고 며느리 이현도 난데 굳이 이걸 하나하나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은 거예요. 며느리 이현이 20점이면 부인 이현은 5점만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토탈 80점만 되면 잘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공부와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 일도 공부도 둘 다 다같이 잘하려고 하면 둘 다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잘하려고 하니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후배들은 즐기면서 대학원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학교에서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수업 듣고 여러 사람 만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게 가장 나은 방법 같아요. 직장은 잠시 잊어두고 쉬러 오는 거죠. 머리를 비우고 또다른 나를 만나러 오는 시간이니까요. 그렇게 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그걸 마지막 학기 때 깨달았어요. 늦게 발견을 한 거죠. 제가 가장 힘들었던 건 첫 학기 때였어요. 1학기, 2학기 때 다 힘들었죠. 세미나 준비도 아주 잘해야 해, 최고로 잘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니까 머리만 아프고 더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3학기 때부터 '못 하면 말지,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다른 사람 의견도 듣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3학기 때 출석률이 더 나아졌죠. 완전히 즐긴 건 마지막 학기였어요(웃음).

 

 

- 세미나 때마다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발표에 대해 교수님들께서 칭찬을 하셔서 인상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배운 것은 아니구요,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잠시 쉴 때 1년간 간호학원에서 강의를 한 적은 있어요. 발표는 대학교 때부터 많이 했었어요. 조별 발표를 하게 되거나 하면 제가 나가서 하곤 했죠. 그런데 사실은 카메라 울렁증도 있고 얼굴 굳어지고 그래요.

 

 

- 이현 선생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혹은 가치)은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가족'이네요. 삶의 이유죠. 어떨 때는 원수 같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뭘 해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죠. 엄마 아빠, 우리 어머님 아버님, 내 남편, 내 아이들. 그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그냥 저 혼자 살았으면 열심히 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사는 거죠. 그 사람들한테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고, 부인이 되고 싶고,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분이 저 서른 살 때 그런 말을 했어요. "세상엔 당연한 게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다. 자식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감사한 일이다. 손 있는 사람은 손으로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때 저는 정말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어. 사실 저는 항상 제가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늘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만하면 됐지' 합니다. 노력하는 나,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 살면서 꼭 하고 싶으신 것이 있나요?

 

저는 다이어트가 굉장히 절실하구요(웃음). 그런데 이건 늘 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 이 순간은 뭘 바라고 있는 게 없어요.

 

.. 지난달까지는 자재요양병원 인증을 통과시키는 게 목표였죠. 그래서 연등 달 때도 '인증통과'라고 썼어요(웃음). 지난달까지는 제 목표가 그거였거든요. 저는 우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너무 좋아요.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내가 병동에서 본 환자분들이 표정들이 그래서 다 좋으셨구나' 알게 되었죠. 아닌 말로 '나중에 우리 엄마아빠도 모셔와야지' 그런 생각도 하죠.

 

자재요양병원 임종실에선 정말 임종하시는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가족들에게 충분히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줘요, 여덟 시간 동안을요. 처음엔 다들 슬퍼하시다가 시간이 지나면 정리를 하시더라구요. "너는 뭘 알아보고, 너는 누구에게 연락하고" 이러면서 "우리 엄마 잘 가셨어" "우리 아빠 잘 가셨어" "우리도 잘 살아가면 돼" 하시구요. 환자분을 보내드릴 때도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불자도 아니고 종교도 없어요. 왜 합장하는지도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 임종의식을 할 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성스러운 무언가가 있어요.

 

- 인생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요?

 

우리 아이들이죠.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 엄마 아빠도요. 인생 최고의 선물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어릴 때 굉장히 내성적이었고 말도 한마디 못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엄마하고 떨어지는 게 불안해하는 분리불안을 겪어서 학교만 가면 아파서 조퇴를 할 정도로 학교생활이 엉망이었어요. 성적도 아주 안 좋았구요. 그런데 아빠가 부도나고 힘들어지면서 살아야겠었나 봐요. 그 다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제가 변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성격이 많이 변했죠.

 

제가 어렸을 때는 왕따도 당해봤어요. 그래서 지금 사람들을 더 좋아하나 봐요. 또다시 왕따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항상 모든 사람한테 80점 이상이어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싫다 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생각으로 바뀌었죠. 동전의 양면, 단점과 장점이 같이 있는 것 같아요.

 

 

- 10년 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너 참 애썼다, 지금의 저한테도 하는 말이거든요. 너 참 사느라고 애쓰는구나. 애썼어, 정말 애썼다, 너 참 애썼다 애 키우느라고. 애 둘 다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하느라고, 남편이랑 둘이서. 참 애썼네, 잘 살았네, 지금의 저한테도 그 말을 하고 10년 후의 저한테도 그 말을 할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또 일이 벌어지면 해결해 나가야죠. 그럼 또 애쓰겠죠. 그럴 것 같아요.

 

- ‘마음을 한마디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요?

 

너와 나. 마음이라는 게 저 혼자 갖고 있다고 해서 전달이 되지는 않거든요. 좋은 마음이든 싫은 마음이든 상대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찻잔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래서 누군가가 있는 너와 나인 거죠. 싫든 좋든 좋은 마음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있어야 하고, 그런 것 같아요.

 

 

- 졸업을 앞두고 사랑하는 후배님들께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저보다 잘하고 계시고 저보다 능력들이 출중하시기 때문에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열심히 살고 계신 분들이라 너무 보기 좋아요. 앞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갈 수 있는 일에 초대해 주신다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얼마든지 참석하겠습니다.

 

- 인터뷰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