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는 명상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8)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2019. 12. 29. 16:51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8)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 수행의 목표는 성불(成佛)이다.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불자들의 인사말 중에는 성불 하세요라는 말이 가장 흔하다. 또는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묶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도 한다.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증득이라고도 한다. 무아의 대한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불법에 바탕을 둔 해석이 있는가하면 주관적인 신비한 경험을 무아라고 하는 견해들도 있다. 무아의 대한 해석은 불교교리에 대한 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분별심이나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도 한다. 하나의 목표점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신치료 분야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소중하게 적용되고 있다. 정신건강이란 관점에서 불교의 목표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종교적의 본질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실존적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논의이다. 정신치료는 학문의 영역이고 또 과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신비한 색체는 일단 배제된다. 전생의 문제나 기도의 공덕, 또는 초월적인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임상적인 문제들과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내용을 다룬다.

 

간화선법의 체계를 마련한 대혜종고 선사께서는 서장에서 애응지물(礙膺之物), 즉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고 밝혔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적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불편함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으면 사는 것이 불편하다. 일상의 삶이 수시로 흔들리게 된다. 속된 말로 열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쉽게 열 받는 사람을 자유인 또는 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자유인이다. 애응지물에서 벗어난 사람을 도인이요, 성인이요, 부처라고 하는 것이 대혜선사의 가르침이다. 공자는 나이 칠십이 되어서는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 걸림이 없는 삶의 경지를 나타낸 말이다. 걸리는 것이 없다는 말은 올라오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경계(대상)를 만나면 마음이 움직이고 감정이 올라오게 마련이다. 원각경에는 그것을 증애심(憎愛心), 즉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라고 했다. 사랑과 미움은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감정이지만 호오(好惡)의 감정도 미추(美醜)의 감정도 항상 움직이게 된다. 경계를 만날 때 일어나는 감정을 참된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경험의 지배를 받는 중생들의 삶이다. 사람들은 애응지물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마음에 걸린 것들에 매달려서 불편하게 살아간다. 이미 조건화되어 있어서 걸린 것들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치료적 관점에서 볼 때의 불교의 목표는 걸림이 없는 사람, 올라오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광대무변한 불교의 진리를 모두 함축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일반인들의 실천적 수행방안으로서는 적확한 지적이다. “성불하세요라는 말보다 마음에 걸린 것들을 내려놓으세요라고 하는 말이 훨씬 살아있는 표현이다.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에 가깝다.

 

유식학에서는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아뢰야식이라고 이름 한다.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좋은 경험이나 나쁜 경험들을 모두 보관하는 창고를 말한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도 이곳에 모여 있다.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역동도 많은 차이가 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도 있고 약간의 불편만을 느끼는 것들도 있다. 애응지물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 때문에 걸린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명확하게 안다면 쉽게 벗어날 수가 있다.

 

애응지물을 자각하고 살펴서 벗어나는 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모든 명상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통찰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 경계를 멀리하고 대인관계를 정리하고 혼자 지내면서 자신을 살피는 작업은 안전하긴 하지만 통찰의 기회는 줄어든다. 소극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귀를 막아두고 고요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고요함이 아니다. 저자거리에서 중생들과 부대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참된 수행자이다.

 

아뢰야식을 살피는 작업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괜히 건드려서 과거의 아픔을 되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응지물은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정리해야 극복되는 감정이다. 물론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며 정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렇게들 살아간다. 그러나 참 된 자기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애응지물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이나 명상을 인생의 진검승부(眞劒勝負)라고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