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는 명상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7)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2019. 9. 27. 15:45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7)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불교의 수행법은 다양하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근기에 따라 자신에게 알맞은 수행의 길을 찾아서 가면 된다. 참선이 맞으면 참선을 하면 되고, 염불이 맞으면 염불수행을 하면 되고, 진언이 맞으면 진언수행을 하면 된다. 궁극의 도달점을 하나이다.

 

유식학에서는 수행단계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가 바로 그것이다.

자량위는 수행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흔히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노잣돈을 준비하는 과정에 비유된다. 멀고도 험난한 수도의 길을 떠나려면 필수적인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 이미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유식의 실성에 머물고자 하나, 아직은 능소이취(能所二取)의 번뇌가 단멸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능소이취란 능취()와 소치()의 두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와 대상에 대한 번뇌를 말한다.

 

자량위는 네 가지의 수승한 힘에 의지하는데, 인력(因力), 선우력(善友力), 작의력(作意力), 자량력(資糧力)이 그것이다. 인력은 훈습된 좋은 종자를 말하며, 선우력이란 좋은 도반이나 선지식을 만나는 인연을 말하고, 작의력이란 나쁜 일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않는 힘, 자량력이란 이미 쌓여진 복덕과 지혜의 힘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힘에 의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수행한다. 자량위에서는 화엄경의 수행 52단계 중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삼십 위를 닦는다.

 

두 번째는 가행위이다. 자량위가 여행에 필요한 노잣돈을 준비하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단계이다. 즉 수행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자량위에서 깨닫지 못한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게 된다. 여기서는 유식지관(唯識止觀)을 닦는 입문적 관법이다. 대상을 살피는 힘이 더욱 깊어지고 지혜의 힘으로서 나와 대상이 모두 공함을 깨닫고 아공과 법공을 거듭 인가하여 원만하게 성취하는 경지이다. 아직 세간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유류법 중에서 가장 수승하고 세간법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세제일위라 한다.

 

세 번째는 통달위이다. 통달위는 목표로 삼은 여행지에 일단 도착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통달위에서 소지장이 없어지고 아공과 법공에 의해 현현된 진여, 즉 진리의 본성을 요해한다는 뜻이다.

 

소지장은 대상에 대해 집착함으로 발생하는 장애로 객관적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이다. 이 위를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견도는 무루지를 발하고 진여를 증득하는 초입이니 십지(十地)의 초지에 해당하는 환희지이다. 십지는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해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이다. 화엄경의 수행 52단계 중 41위부터 50위까지에 해당한다. 견도위 이전은 범부 중생이고 견도 이후부터는 성자에 해당한다. 견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는데,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가 있다. 진견도는 본질적인 측면을 볼 수 있는 지혜로 만유공통의 근본체성을 보는 것이며, 상견도는 현상적인 측면을 보는 지혜로 대상의 차별성을 볼 수 있는 지혜이다. 통달위는 나와 대상에 대한 분별상을 버리고 무루지를 증득하는 자리가 된다.

 

네 번째가 수습위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근본적인 수행이 이루어진다. 수습위를 통해 번뇌를 끊고 단계적으로 진여를 증득하여 고유의 무명을 철저히 소탕해야만 비로소 본래 면목을 보게 된다.

 

수습위에서 증득하게 되는 무분별지는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출세간의 지혜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와 열반이라는 두 가지의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무분별지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야 얻을 수 있으며 이 지혜는 나와 대상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고, 묘한 운용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한다. 조중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가 거칠고도 무겁다는 뜻이다.

 

전의(轉依)는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버리고 보리와 열반의 종자를 얻으므로, 두 가지 조중을 버리고 두 가지 전의과를 증득함을 말한다.

 

수습위에서 비로소 진정한 수도의 과정에 입문하게 되는데, 6개의 근본번뇌 가운데 마지막인 악견번뇌가 사라진다. 악견은 워낙 견해가 강해서 악견이라 하는데 다섯 가지가 있으며 오리사(五利使)라고 한다.

 

오리사(五利使)의 첫째가 신견(身見)이다. 신체가 오온의 작용으로 이루진 것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아견(我見), 음식과 재물 같은 것은 고정불변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소견(我所見)을 합하여 신견이라 한다.

 

둘째, 변견(邊見)이다. ()과 유() 또는 단()과 상()의 극단적인 견해는 모두 양변에 치우치는 것이므로 중도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변견이라 한다.

 

셋째, 사견(邪見)이다. 잘못된 견해로 가장 중대한 것이 인과와 연기법을 믿지 않고 우연에 맡기고 방종하고 방만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믿지 않으므로 악을 고무하고 장려하게 된다.

 

넷째, 견취견(見取見)이다. 자신의 견해만을 취하고 고집하는 것으로 자기와 다른 견해들은 배척해 버린다.

 

다섯째,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자신이 지키는 계율만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마지막 단계가 구경위이다. 구경은 지극(至極)이라는 의미로, 수도하여 지극이면 성불이고 불위(佛位)이다. 번뇌가 없는 무루의 경계이며 법신이라 이름한다. 번뇌를 지닌 채 쌓은 지혜를 유루지라 하고 번뇌가 사라진 곳에서 얻은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구경위는 번뇌가 흘러내리지 않는 무루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고 지고지선한 선이며, 영원불멸이며, 고통이 없는 안락이며, 탐진치에 얽매이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경지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목적지이다. 이 단계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유식수행의 계위를 요약하면 수행자가 수행의 자산(자량)으로 삼아야 할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십위를 닦고 준비하는 자량위와, 네 가지 선근을 닦는 가행위와, 아공과 법공의 도리를 깨닫는 통달위와, 십지를 닦아 십성에 이르는 수습위와, 모든 의혹이 끊어지고 깨달음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진식득지에 이르게 되는 구경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