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문 자리

불교와 명상심리 공부가 나에게 미친 영향 관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2019. 7. 16. 16:33

[마음이 머문 자리] 교육을 통한 생각들, 느낌들, 책이나 영화, 그 무엇에선가 문득 마음이 머무는 그 어느 구절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머문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보세요.

 

대학원 야외수업 후기불교와 명상심리 공부가 나에게 미친 영향 관찰

 

최성혜 (명상심리학과 석사과정 재학중)



별 생각 없이 살다가도 가끔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나름의 이유나 목적을 정할 때가 있다. ‘19.2월 명상심리학을 배우기로 하였을 때에도 그랬는데, 그때 나의 목표는 “쉰까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살았으니 남은 쉰은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쉰을 넘기는 무렵의 나에게는 당연하기도 했고 꽤 그럴싸하기도 했던 이 “문장” 혹은 “생각”이 지금도 무사할까? 혹시 무사하지 않다면 그 생각에는 어떤 흔들림이 있었을까?

 

이 보고서는 ‘19. 1학기를 보내면서, 당초의 목표에 관한 나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정리한 것으로, 작성하면서 그것이 내 안에서 납득된 생각인지 그저 남의 말을 들어 아는 것인지 더듬어 보고, 가급적 내 안에서 납득된 생각을 기록하고자 했다.


비교의 기준 : 쉰까지 주어진 상황대로 살았으니 남은 쉰은 주인으로 살고 싶다?

인식의 한계: 나는 나를 알까?

 

‘19.2월 당시 이 문장은 나에게 앞으로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다짐이나 각오를 나타내는 긍정문이자, 미래의 삶에 영향을 끼칠 未來時制文이었다.


하지만 ’19년 상반기를 경과하면서, 나는 이 문장에 내가 의도하지 않은 몇 가지 판단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구체적으로 ‘① 나름 열심히 살았으나 애쓴 것보다 성과가 적다. ② 나는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 ③ 현재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라는 類의 것들로, 요컨대 나는 과거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억울해하거나 화가 나 있었던 것이고, 이런 느낌은 나의 내면에 누적되어 나도 모르게 내가 쓴 문장에서 스멀스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얼마든지 내포될 수 있다’는 경험은 내가 해석해 받아들인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도 실제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개체 간 소통’이라는 것이 이렇게 가변적인 상황에서 부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상대방의 말 한마디, 눈짓, 몸짓 하나에 수없이 상처받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타인에게 섭섭해 하고 성내는 것은 그저 소통수단(話者의 언어, 몸짓, 눈짓⇆ 聽者의 감각기능)의 성능에 대한 기대치가 실제보다 높은데서 비롯된 해프닝은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 그 시점에서의 인식은 시간과 더불어 계속 재구성되면서 굳어진 것일 뿐, 애당초 실제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내 속에 묵혀 있는 생각이든, 새로이 떠오르는 생각이든 그것들의 무게가 그다지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탐.진.치: 내 삶은 억울했을까?

 

이전에 나는 확실히 내 삶이 무엇인가 불공정하고, 나의 선의와 노력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경험분석에 몇몇 타인의 공감이 버무려져 내게는 명확한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살면서 감내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가 굉장히 제한적임을 납득하고, 막연히 알던 인과법칙을 꼼꼼히 배우면서 (마음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인과율(因果律)에 벗어나서 나에게만 예외적으로 내 몫이 아닌 억울함이 왔으리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럼 오랫동안 내게 머물고 있는 억울함은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살펴보면, 딱히 구체적 사례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살면서 그저 내게 왔으니 내 것이라고 여겼던 행운이나, 남 뒷말을 하면서 내 뒷말은 듣기 싫어하는 등 나와 남에게 다르게 적용한 기준들이 적지 않았다. 행운은 잊어버리고 억울함은 오래오래 들고 있었으니 어리석었고, 덜 주고 더 받으려 했으니 어리석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화를 내었고, 순리는 모르고 행운만 바라며 욕심을 내었다. 모두 도리에 맞지 않다. 탐진치였다.

 

부끄러운 깨침이지만, 자책할 것은 없다. 탐・진・치가 나 개인의 부족함이나 과오가 아니라, 감각을 가진 인간이 구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가르침에서 안도와 위안마저 느낀다. 삶은 외부와의 투쟁도, 가까스로 견디어내는 것도 아닌 그저 겸허히 받아들일 무언가로 여겨지며, 순간 마음이 겸손해진다.

 

남은 과제는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할 굴레라며 짊어지고 갈 것인지, 무모하다 하더라도 벗어나고자 시도할 것인지 정할 일이다.

 


알아차림/받아들임: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입학 당시 내가 생각한 ’주인으로서의 삶‘은 대략 ‘주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길을 찾거나 만들어 가는 것’ 정도의 개념이었다.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꿈이 컸다.

 

하지만, 이제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온갖 괴로움을 지어내는 탐・진・치를 벗어나기 위한 무모한 도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한 학기의 수업은 도전의 방법으로 수행을 제시했다. 주인으로는 살고 싶고, 도전할 용기는 없다.

 

타협 또는 간보기. 나와 세상에 무지한 채 습관대로 사는 것은 호랑이굴에서 살아남기와 같으니 정신을 곧추세워 차려 일렁이는 흐름 속에서 가급적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미 생긴 일들은 그저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앎을 넓혀가고, 잘못된 프레임들을 거둬가다 보면 조금은 더 자유롭고 유연한 삶을 살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살면서 불쑥불쑥 불편한 감정을 만나면, 무턱대로 화내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만난 냥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고 보살피겠다고 마음을 내면, 설령 알아내지 못해도 시도로서 재미있고, 알면 알게 되어서 좋은 삶이 되지 않을까? 비록 그 앎이 항상적이고 불변하는 앎이 아니더라도.

 


놀이: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한 시도

 

* 명상(17회, 밴드기록): 집중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느낌, 이상한 증상이 생겨도 불안하지 않고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는 가르침에 감사

* 경계일지 쓰기(15건, 밴드기록): 경계에 부딪힐 때 생기는 반응을 보고, 관점을 바꾸어 반응을 조절하고, 기록하는 것은 재미있으나, 게을러 자주 하지는 못함

* 진언(30분): 생각보다 어려움이 없었으나, 명상에 더 집중하겠다는 변명으로 생략

* 운동밴드 활동(3개월): 3월부터 운동밴드 활동에 꾸준히 하면서 몸운동이 마음근육을 키운다는 걸 새삼 느꼈으나 이또한 끈기부족으로 4개월 차에 중단

* 안하던 일 하기(어린 시절 상처를 엄마께 말하기, 母子 사이에서 벗어나기, 불편하다고 여겼던 사람들과 술 마시기, 다르게 반응해보기, 경험과 느낌 말하기):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지만 재미있는 시도, 상대의 반응에서 의외로 내가 자유로웠음

* 기상할 때 기분 살피기: 기억 나는 꿈을 세 번 꾸었고, 꿈의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내면의 욕구와 연결고리를 찾은 꿈은 지금도 기억하나, 현실에서 달라진 건 모르겠음

* 공익요원 테스트: 주문의 효과 체험

 


효용과 한계

 

확실히 ‘19년 2월의 나에게는 어떤 모티브가 필요했다. 대학원에서의 배움과 학우님들 교수님들은 충분히 긍정적인 모티브가 되어주셨다. 세상에 대한 인식의 확장은 나를 더 유연하게 해주었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마음속 근기도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더 살피게 되었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면서 기대를 낮추는 방법도 어렴풋이 이해된다.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보인다.


이런 변화는 몸무게를 늘게 했고, 습관적으로 시달리던 체증을 완화시켰다. 목표 지향적으로 내달리던 일하기 방식을 조금은 벗어났고,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원망을 잊어버리고 지나는 시간이 늘었다. 연락이 뜸하던 친구에게 먼저 전화하고, 나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입학 때 가졌던 하나의 기원문은 수없는 의문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 그 기원문보다, 배우고 부딪히면서 생긴 의문문이 오히려 삶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공부는 나의 삶에 슬그머니 변화의 씨앗을 심었으나, “막무가내의 게으름”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배움을 삶과 접목시키는데 필요한 성실과 끈기는 어떻게 불러내어야 할까?

 

 

*이 글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열린 2019학년도 1학기 기말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으로 발표자 최성혜님의 허락을 받아 게시하였습니다.